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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Sep 06. 2023

한 사람이 올 때 그의 과거도 함께 온다고 했던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명언이 담겨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마주하는 연인의 모습은 반은 진짜고 반은 가짜다. 연애를 하면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도 있다. 연애하는 동안에는 가능한 일이다. 외적으로는 꾸며진 모습만 보여주고, 대화할 때는 그럴듯한 말만 해주면 충분하다. 데이트는 특정한 공간에서 한정된 시간만 공유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의 현 남편은 구 남친 시절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멋진 멘토였다. 가족도 친구도 해줄 수 없는 현명한 조언을 해주곤 했다. 과거형이다.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다. 현 남편은 더 이상 나에게 그런 조언만 해주지는 않는다. 


연인은 특수한 존재다. 가족은 아니지만 보통의 친구 이상이고 진심으로 내 인생을 함께 고민해 주는 사람이다. 애정이 담긴 동시에 객관적인 시선에서 조언해 준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아직까지 “가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연인의 인생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다. 여전히 내 인생과 니 인생은 구분되어 있다. 그래서 한 발 떨어진 시선에서 조언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연인에서 가족이 되면 서로를 절대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내 인생의 변화가 니 인생의 변화고, 니 인생의 변화가 내 인생의 변화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구 남친은 현 남편이 되어 내 인생에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개입한다. 연애할 때 보지 못했던 그의 인생이 비로소 내 인생에 물 밀듯이 파도쳐 흘러온다.


남편의 말과 행동에는 남편이 살아온 세월이 담겨있다. 나 또한 그렇다. 모두의 인생이 그렇듯 남편의 인생에도 크고 작은 굴곡이 있었다. 연애 시절 얼핏 들었던 남편의 굴곡들은 이미 과거형으로 끝난 사건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라 그 모든 사건들을 토양 삼아 그 위에 내 남편이 서있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안정된 직장에 다니던 멋진 내 남친 옆이라면 내 결혼생활은 빛날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남편의 초라한 모습을 마주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남편과 본가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갈등도 있었고, 남편이 시부모님과 정신적으로 독립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장애인 누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남편의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은 내가 도무지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남편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가진 문제들도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하지 못했었고, 내 인생의 성과들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해결하지 못한 채 결혼을 했다. 서로 다 큰 어른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결국 몸만 커버린 애송이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이른 나이에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사람이 요즘 몇이나 되겠는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결혼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나와 내 남편은 결혼하고 나서야 우리조차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각자 모범생 효자, 효녀라고 착각했다. 예쁜 말로 포장했을 뿐, 결론적으로 우리는 정신적으로 잘 독립하지 못한 채 결혼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혀를 끌끌 차며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 독립도 못한 채로 결혼하다니, 미성숙한 사람들이군. 쯧쯧.”


하지만 효자와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사람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종이 한 장보다도 더 얇은 차이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오히려 같은 종이에 붙어 있는 서로 다른 단면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하고 난 후에 어떤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나 자신도 모른다. 내가 효자인 건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자식인 건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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