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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Sep 06. 2023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는 건 무리다.


언젠가 부모님 신혼여행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선을 보고 결혼한 아빠와 엄마의 연애는 짧았다. 그래서인지 사진 속 아빠 모습에는 이 여자를 잡았다는 왠지 모를 우쭐함이, 엄마의 두 뺨에는 발그레한 설렘이 번지고 있었다. 


이제 그 두 청춘은 온데간데없다. 그들은 어느새 하얘진 머리칼의 할머니와 광채 나는 머리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지금 서로에게 남은 건 상대방에 대한 약간의 고마움과 약간의 원망 섞인 시선뿐이다.


철없던 초등학생 시절 내가 부모님께 물었던 질문이 있다. “아빠, 엄마는 왜 이혼 안 해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물어봤던 걸로 기억한다. 저렇게 지겹도록 싸우시면서 왜 같이 사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아빠는 “부부 사이에는 자식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걱정하지 마라.”, 엄마는 “너네가 있잖아.”라고 답하셨다.


세월이 흘러 사춘기가 되어서는 부모님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다 큰 어른들이 계속 싸우는 건 서로 사랑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너도 나중에 커서 결혼하면 알게 돼.”라고 하시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식 앞에서 괜히 민망해서 아무렇게나 허공에 내뱉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슬프게도 결혼 2년 차쯤 나는 그 말 뜻을 이해하게 됐다. 부부가 싸우는 건 서로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매번 마주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같이 해결해 나가는 게 벅찼기 때문이다. 한쪽이 잘못한 게 아니라, 양쪽이 서툴러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제 어린 시절 아빠, 엄마가 대답해 주신 답변을 조금이나마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됐다.


“부부 사이에는 자식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라는 아빠의 말씀은 부부간의 사랑에는 이성적인 끌림과 설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배우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마음 한편이 아린 연민을 느낄 수도, 상대의 어설픈 모습을 보며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저 사람이 꿈꾸는 목표가 마치 내 꿈인 것 마냥 이뤄지길 바라기도 하고, 내가 못하는 부분을 대신 해결하는 모습을 보며 존경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가끔 나를 더 많이 챙겨주길 바라는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에는 증오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엄마의  “너네가 있잖아.”라는 답변은 자식만 보고 산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신과 남편을 반반씩 닮은 자식을 보면서 그 남편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돌이켜 보면, 아빠를 뒷담 하시던 엄마의 마지막 멘트는 늘 이렇게 끝이 났다. “그래도 너네 아빠나 되니까 엄마랑 사는 거다. 너네 아빠도 엄마 만나서 고생이 많다.” 정작 남편의 얼굴을 마주하면 오랜 세월 켜켜이 누적된 상처가 불쑥불쑥 떠올라 화가 날 뿐이지, 엄마의 마음속에는 아빠에 대한 고마움도 항상 같이 있었다.


어른들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보면 명언이 참 많다. “매일 설레면 심장병 걸려서 죽는다.” 


머리를 탁 치는 명언이다. 사랑의 모양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뀐다. 슬프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걸 깨닫기 전까지 나는 남편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며 억울하다고 소리만 질렀다. 하지만 남편만 변한 게 아니었다. 나도 변했고 상황도 변했다. 


사랑의 모양과 방식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서로에게 소홀해져서가 아니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장이 열리면서 이성적 끌림이라는 하나의 감정이 다른 더 풍성한 감정으로 세분화되는 것뿐이다. 물론 이성적으로 설레는 마음이 조금 덜해진 것은 아쉽다. 대신 그 자리에는 서로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생겼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났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랑의 모습이 변해가는 걸 내가 슬프게 생각하면 슬픈 것이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 결혼생활의 행복과 불행은 나에게 달렸다. 


이제 결혼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변할 것 같지 않던 검은 머리도 결국 파뿌리가 된다는 게 핵심이다. 변했는데 변하지 말라는 게 얼마나 가혹한 말인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면 그 변한 세월 동안 쌓은 추억을 함께 떠올리면 된다. 물론 아직 내 머리가 파뿌리까지 되어보진 않아서 장담은 못한다. 지금 이렇게 결혼을 추천하더라도 언젠가 이혼을 추천하는 글을 어디선가 몰래 쓰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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