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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Sep 06. 2023

죽도록 미운 현 남편은, 미치게 사랑했던 구 남친이다.


결혼을 앞두고 한창 청첩장 모임을 할 때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으레 하는 질문은 똑같았다.

“왜 결혼을 결심했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고, 걱정 어린 시선으로 질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거창한 사건은 없다. 연애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뿐이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이유를 말하자니 너무 장황하고, 짧게 답하자니 어떻게 압축할지 막막했다. 당시 남아 있는 청첩장 모임이 많았기 때문에 말하기도 쉽고 듣기에도 잘 납득 가는 답안이 필요했다. 곰곰이 내 연애를 돌이켜보며 정리한 모범 답안은 이랬다. 


“연애하는 동안 이 사람의 어떤 면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딱히 해 본 적이 없어. 사람은 절대 쉽게 바뀌지 않잖아. 아무리 끌리는 사람이라도 ‘저 사람의 어떤 면은 내가 바꿔야지’라는 생각이 들면 결혼을 못할 것 같아. 우리는 다른 점이 많지만 그 점들이 서로에게 크게 거슬리지 않아서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


이 답안으로 남은 청첩장 모임을 잘 마무리했다. 결혼식도 별문제 없이 치렀다. 문제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결혼해서 함께 살다 보니 남편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개조하고 싶어졌다. 심지어 남편과 연결된 시댁까지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은 못된 마음까지 들었다. 시댁까지 날려버리고 싶다니, 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아내인가.


이런 무서운 여자도 연애시절에는 대단한 콩깍지를 삽입하고 있었다. 내가 바로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손만 잡아도 설레던 시절이었다. 미래를 꿈꾸며 희망찬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결혼생활이 기대됐다. 매일 아침 달달한 모닝 키스와 향기로운 커피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 거 없이도 나는 남들과 달리 고상하고 우아한 결혼생활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미치도록 사랑했던 내 남친이, 왜 죽도록 미운 남편이 되었을까. 나 역시 한 때는 요조숙녀 뺨치는 여친이었는데, 왜 무서운 아내로 변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삽입된 콩깍지가 한 꺼풀씩 벗겨진 거다. 나와 남편은 모두 변한 게 없다. 연애할 때 그 사람 그대로다. 각자 가진 성격의 일부를 용의주도하게 숨기고 사기 친 적은 단연코 없다. 문제는 단지 내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상대방이 가진 성격의 반대 단면을 발견했을 뿐이다.


나는 구 남친이 감정 기복 없고 뭐든 차분히 고민하고 결정하는 모습에 반했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살펴보니 현 남편은 감정 표현에 서툴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남편 입장에서 나는 속마음을 잘 말하고 하루에 있었던 일을 참새처럼 쫑알대며 갈등이 생겨도 대화로 잘 푸는 현명한 전 여친이었다. 그런데 남편 역시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하고 무섭도록 말이 많고 어떤 문제가 생기면 바로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질 급한 아내랑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각자 바뀐 것도 숨긴 것도 없다. 그런데 넌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지 않았냐며 서로 원망을 하니 싸울 수밖에 없다. 환장할 노릇이다. 앞선 목차에서 “사랑”의 모양은 바뀐다고 말한 것과, 청첩장 모임에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 딱 맞다. 부부가 되어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연애 때와는 달라졌지만, 각자는 연애 때나 지금이나 원래 모습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니 결혼은 쌍방과실이다. 그동안 안 보거나 못 본거지, 사람이 변한 건 아니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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