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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Sep 07. 2023

콩깍지 씌어서 뵈는 게 없었다.


예상되는 위험들은 연애할 때부터 도처에 깔려 있었다. 수많은 경고 신호들을 무시한 건 나였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었다. 남자가 귀여워 보이면 끝이다.


나를 만나기 전에 남편이 교제한 연인의 존재부터 이야기해볼까 한다. 시발점은 예비 시어머니의 자랑 타임이었다. 연애할 때 남자친구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어머님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 갑자기 아들의 졸업 사진을 구경시켜 주셨다. 아들이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우셨나 보다.


그 사건이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올지는 모르셨을 거다. 졸업앨범에서 드디어 남편을 찾았다. 남편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작은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순간 웃음을 빵 터뜨리며 어머님께 여쭤봤다. 


“우와~ 어머니, 오빠 반지 끼고 있네요? 저게 도대체 무슨 반지일까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어머님은 “어어… 그거 내가 사준 반지야.”라고 멋쩍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순수해 보였고, 민망해하는 남편도 귀여웠다.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때는 진짜 그랬다. 오히려 예비 시아버지께서 남편을 향해 “넌 각오해라. 이제 결혼하면 이걸로 평생 욕먹을 거다.”라며 웃으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하늘에 계신 시아버지께서 미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으셨던 게 분명하다.


나 역시 드라마나 영화에서 과거 연애로 트집 잡는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라면 쿨한 여자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건 정작 나는 남편과의 연애가 인생 첫 연애라는 점이다. 아무리 쿨해지려 노력해도 절대 쿨해질 수가 없었다. 문득문득 생각나고 심지어 장기 연애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니 왠지 밑지는 결혼을 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결혼 초반 싸울 때마다 나는 그 사건을 꼬투리 잡아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분명 연애할 때는 적당히 놀리는 선에서 끝난 일이다. 하지만 결혼한 후에는 그 사건이 생각날 때마다 울컥했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이 씨X!!!!! 오래 사귄 그 X이랑 살지 왜 나랑 결혼했냐!!!!!”


나는 입에 도통 무엇을 물었는지도 모를 막말을 내뱉었다. 남편의 이전 연애가 신경 쓰였으면 진작 이별했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때는 분명 모든 것이 귀여워 보였는데.


다음으로 건강에 관한 주제도 있다. 말하자면 남편은 잔병치레가 많고, 나는 어디 하나 부러져야 그제야 아프다고 말하는 성향이다. 남편은 184cm의 큰 체구고, 나는 160cm에도 못 미치는 작은 체구다. 연애할 때는 나보다도 훨씬 큰 사람이 아프다고 징징대니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결혼하고 난 후에도 자꾸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니 왠지 꾀병인 거 같고 오버하는 것 같았다. 남편의 장 트러블은 허구한 날 생겼다. 힘들 때면 두통으로 앓아누웠고, 스트레스가 심한 날은 거의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잤다. 챙겨만 주고 싶던 나의 팅커벨 남친은 이제 누가 데려간다 하면 웃돈이라도 얹어 주고 처리하고픈 내 남편이 됐다.


또 다른 주제는 시간 개념의 차이다. 나는 적어도 약속 시간 10분 전에는 미리 도착하는 습관이 있다. 반면, 남편은 시간을 빠듯하게 맞춰서 도착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함께 첫 여행을 가는데 기차 출발 1분 전에 나타나는 남친이면 말 다했다. 


이렇게 시간 개념과 일의 진행 속도가 맞지 않는 건 이미 연애 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남편도 본인 방식대로 번듯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했으니 같이 살면서 큰 문제가 될까 싶었다. 비슷한 일로 가끔 투닥거려도 사랑싸움 정도라 생각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 당시 나는 남친 얼굴만 봐도 좋아서 헤헤거리는 심한 병을 앓고 있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문제는 조금씩 커졌다. 양가 의견을 남편과 내가 중간에서 조율하는 일들이 생겼다. 시댁은 모든 걸 차분하고 느리게 진행했다. 친정은 많은 부분 신속하고 발 빠르게 처리했다. 더욱이 시댁은 장애를 가진 형님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정 변동들까지 생겼다. 처음 한 두 번은 넘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상황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남편과 시댁이 배려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친정에는 좋게 잘 포장해서 말을 전했다.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자. 나는 전형적인 집순이다. 반면, 남편은 친구도 많고 세상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연애할 때는 외향적인 남자친구가 멋지게만 보였다. 이렇게 성향이 반대인 것도 경고 신호였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혼하고도 남편은 여전히 친구들과 약속을 빈번하게 잡았다.


연애 때부터 드러났던 남편과 나의 차이는 대부분 결혼 후 갈등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 글은 전적으로 아내인 내 입장에서 쓰는 거다. 내가 남편을 알아갔던 과정을 말하는 거라, 남편과 시댁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뿐이다. 독자들은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편을 가르거나 남편과 시댁을 비난하려고 쓰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따지자면 내 쪽에 훨씬 더 많은 문제가 있다. 나는 외골수 기질과 청개구리 같은 반골 성향이 강하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린다. 막말은 또 어쩜 그렇게 잘하는지 상대방에게 비수 꽂는 말만 골라서 잘도 한다. 사소한 문제라도 남편과 대화가 안 통할 때는 속된 말로 지랄 발광을 한다. 게다가 싸울 때면 옛날 일까지 죄다 끄집어내서 사람 미치게 하는 전매특허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다. 이 정도면 내 자기소개도 충분히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고픈 말은, 연애하는 동안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현실을 직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 전체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는데, 그때 뭘 제대로 판단이나 할 수 있겠는가. 콩깍지는 우리 힘으로 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때가 되면 저절로 벗겨지는 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결혼생활을 하면서 터지는 문제들을 그때마다 하나씩 온갖 애를 써서 해결해 나가는 것뿐이다.

이전 05화 죽도록 미운 현 남편은, 미치게 사랑했던 구 남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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