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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안 Apr 29. 2023

내가 되어 가는 나

난 전라남도 장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몇몇 작가분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쓰셔서 장흥 하면 바다를 같이 떠올리는 분들이 있다. 내가 자란 장흥읍은 바다와는 좀 떨어진 곳으로 읍 중앙에 탐진강이 흘렀다. 꽤 오랫동안 탐진강의 은어가 유명한 1급수를 자랑해 온 곳이다. 오래전에 그곳으로부터 마음을 거둬들인 뒤로 장흥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기억이 별로 없다.   

  

동네 유명 인사였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은 항상 사람들의 관심과 호의에 싸여 살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기억력이 좋아 객관식 문제 맞추기에 최적화된 나의 뇌가 공부를 안 해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덕분에 늘 칭찬을 받았다. 그 결과 나는 꿈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베짱이로 자라게 되었다. 대신 활자로 된 것은 뭐든지 붙잡고 읽는 습관이 있어서 동화책은 거의 없고 집에는 아버지 책만 있었는데, 알든지 모르든지 읽어대는 통에 이웃 할머니들이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철이 일찍 들었다고 그러시고 통이 크다고 또 칭찬을 해주셨다.  

   

그렇게 무난한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광주에서 자취생활로 고등학생 시절을 시작했다. 내 인생의 회오리는 그때부터 불기 시작했다. 아버지한테 기대어 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엄마를 두고 사업차 시외를 자주 가시던 아버지가 연락 두절이 된 것이다. 우리 집은 안채를 내주고 아래채에 살게 되었다. 주말에 한 번씩 집에 내려가면 집 상황이 일사천리로 변해갔다. 엄마는 가진 재산을 계속 축내가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외향적인 엄마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며 스트레스 해소를 했다. 그 덕분에 우리 집 이야기는 아주 잘 알려진 비하인드 스토리가 되었다. 장흥 터미널에서 내려 집에 가려면 30분 정도 걷게 된다. 탐진강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를 지나는 데 가는 도중 만나는 어르신마다 아버지 이야기를 물어보셨다. 난 그때 그 시절 아버지도 미웠지만, 집안 내밀한 이야기를 다 퍼뜨리는 엄마도 미웠다. 하지만 일찍 조숙한 티를 냈던 나는 다 속으로 삭였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성적순으로 운영하는 영수 우수반에도 엄마 생각해서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 공부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미련 없이 그런 결정을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공부는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다 커버 안 되는 수학, 과학 영역이 있어서 성적이 아름답지 않았다. 가정 문제에 대한 심리적 방황도 따라다녔다. 만화책에 빠져서 그 시간을 보냈다. 고3 때 담임선생님이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한다 해서 원서를 썼다. 지방국립대학인 전남대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 합격했다. 다행히 반액 장학생에다가 사범대라 등록금이 크게 부담되는 상황은 아니어서 엄마도 학교는 가라고 하셨다.   

  

3월 한 달 학교에 다니는데, 대학 생활이 너무 시시하게 느껴졌다. 집에서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명함 몇백 장을 챙겨서 무조건 서울로 갔다. 알바를 하며 날마다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돌리다 15일 만에 아버지랑 연락이 닿았다. 아버지는 자기 집으로 날 데리고 갔다. 엄마보다 더 안 이쁘지만 젊은 여자와 갓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다음 날 아버지와 함께 집에 내려갔다. 동네가 뒤집어졌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절대귀환 하신 줄 알고 문전성시를 이뤘다. 내막을 아는 나는 내심 불편했다. 깊은 밤이 되자 두 분은 길게도 싸우셨다. 그렇게 우리 집은 장흥을 정리하고 광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대학 학과실로 날 데려갔다. 무단결석이 되어 휴학 처리를 했다. 아버지도 새 식구를 데리고 광주에 오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엄마와 우리 생활을 나 몰라라 하진 않았다. 곶감 빼먹듯 살림이 다 축나버린 걸 눈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 때문인지 내가 자란 장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애써 떠올리지 않아서인지 기억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무슨 인연인지... 시댁이 장흥이다. 나 좋다고 주구장창 따라다닌 우리 엄마 스타일인 못생긴 남자가 장흥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발을 딛고 싶지 않았던 장흥을 매년 한 번 이상은 갈 수밖에 없었다. 윗분 시누이들 두 분이 장흥읍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는데 들렸다 하면 날 알아보는 어르신들이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불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요란한 스캔들의 중심에 있던 아버지가 육십을 넘기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뜨셨다. 다행히 엄마에게 남겨진 것도 있어서인지, 아버지가 그렇게 가신 후에야 엄마 인생의 평화가 찾아왔다. 미운 아버지인데도 한 3년 정도는 제대로 보내드리지 못해 혼자 운전하고 가다가 차 안에서 많이 울었다. 부모란 모든 희노애락을 떠나 자식과는 어쩔 수 없이 연결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두 분의 불화를 안 따르기 위해 결혼 후에 나와 너무 다른 남편의 성향에 갈등을 빨리 멈추고 나 자신을 죽여 지내기로 결정했다. 동갑쟁이인 남편의 기를 살려주려고 처음엔 알아도 모른 척 했는데, 그렇게 세월이 흐르니까 남편 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하는 진짜 바보가 되어갔다.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사람들이 나무꾼과 선녀라며 도망 못 가게 아이 셋을 놓았다고 우스개 덕담을 할 정도로 그 당시는 아이 셋은 드문 일이었다. 2년 터울씩인 세 아이 육아에 빠져 나의 젊음도 기울어 갔다. 다행히 육아가 체질인 나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고 행복했다. 남편 일이 밤 12시에 끝나는 일이었는데 아이들과만 편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오히려 늦은 귀가에 감사할 정도로 아이들에게만 푹 빠져 살았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심성 곱게 잘 자라주었다. 내가 욕심을 안 부리고 단 한 번도 공부하란 말을 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상위권을 유지했다. 독립과 자립을 목표로 키웠더니 스스로 알아서 잘해 나갔다. 주말 육아엔 항상 동참해주고 여러 가지 경험과 여행에 동반해서 내 뜻을 따라 준 남편에게도 감사하다. 단 어른이 된 아이들이 언젠가 왜 자기들에게 공부하란 소리를 안 했냐고 해서 그 점은 많이 미안했다. 내가 현실을 너무 몰라 동화책대로 애들을 키웠기 때문이다. 좀 더 커뮤니티 활동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뭐라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을 너무 욕심 없이 키워서 미안함이 있다. 그러나 근성과 내면이 있으니 그다음 몫은 알아서 하리라는 믿음도 있다. 자녀 문제는 어떻게 키우든 가슴 한쪽에 애잔함이 남게 되는 것 같다. 정답이 없다. 

       

어느 정도 아이들이 크자 항상 뒤뚱거리는 남편 일을 도우러 나갔다. 경리 일을 본 지 한 달이 되어가자 사무실이 체계가 잡혀갔다. 마감일까지 어음 막기 바쁘던 남편은 미리미리 내가 가닥을 쳐주자 쫓기지 않고 일을 보기 시작했다. 부부가 되면 마음도 한마음이지만 경제도 한 공동체가 되어 움직여야 한다. 남편한테만 큰 짐을 지게 했구나, 하는 생각에 내심 미안함도 올라왔다.   

  

그런데 인생이란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 꼭 등장한다. 대학 1년 후배가 찾아와서 교대 편입을 같이 공부하자는 거다. 처음엔 안 한다고 했다. 계속되는 유혹에 점점 마음이 움직여갔다.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이 공부하라면서 밀어냈다. 공부를 시작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해본 것 같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45세에 초등교사가 되었다. 학교생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재미있었다. 공부 가르치고, 아이들을 케어하는 것이 딱 적성이었다. 학부모일 때 바라던 교사의 모습을 내가 직접 만들어 갔다. 왜 진즉 이 일을 시작 안 했지 싶게 열정을 다해 움직였다.     

일 시작한 지 이태째 어느 날, 수업을 하는 중인데 행정실에서 호출이 왔다. 내 월급에 압류가 들어온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부부간에는 위임장으로 인감증명을 끊으면 보증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거였다. 그날 어떻게 수업을 했는지 모른다. 학생들 앞에서 침착하기 위해 기를 썼다. 퇴근 후 집에 갔더니 집에도 빨간딱지가 들어와 있었다. 하필 집을 공동명의로 했었는데 집도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열의에 찬 즐거운 마음은 빨리 막을 내렸다. 옆에서 남편을 지켰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부도 금액이 내가 정년까지 벌 돈, 연금을 타는 액수를 다 합해도 턱없을 정도였다. 친정엄마가 당신 집을 팔고 큰 평수인 우리 집을 잡아 주셨다. 다행히 아이들과 밖을 전전하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엄마는 나랑 살림을 합치셨다. 채무자가 진짜 집을 판 것이 아니라며 재판을 걸어서 1년 동안 엄마랑 법원에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이뻐하던 맏사위를 엄마가 미워하기 시작했다. 일찍 퇴근하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이고 일찍 퇴근하냐, 밥을 맛있게 먹으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이고 밥이 들어가냐, 딸을 힘들게 한 사위가 엄마 눈에는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그 말을 직접 사위에게 하지 않고 늘 나만 달달 볶으셨다. 사위를 못 견딘 엄마는 겨우 일 년을 합가하고 사위가 아무 데도 안 가니까 더 못 견딘다며 이제는 쌍으로 우리 둘을 미워하며 월세방이나 얻을 돈을 던져주고 떠났다. 동생들은 함께 사는 엄마의 재산이 나한테 갈까 봐 목 좋은 엄마 아파트를 나 때문에 팔았다면서 자꾸 여러 불만을 쏟아냈다. 결국 엄마는 동생들 말을 따라갔다. 엄마 결정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쩌든지 나는 이 세월을 이겨낼 것이다. 그냥 이렇게만 생각했다.  

    

남편은 유통업체 직원으로 들어갔다. 시스템이 관리해주는 곳에 가니 이제야 실력 발휘를 하기 시작했다. 몇 년 세월이 흐르면서 빚이 다 갚아졌다. 엄마와 동생들과는 그 뒤로 오랫동안 멀어져 지냈다. 엄마와 동생들과 멀어진 외로움, 남편에게 느낀 실망감, 세상에 기죽은 마음 그리고 시작된 갱년기로 힘든 시간들이 꽈리처럼 또아리를 틀고 내 곁에 있었다.     


그 시간을 어찌어찌 견디고 나니 어느새 시니어라고 부르는 나이가 되었다. 그게 지금의 나다. 지극히 평범히 살아 온 나지만 단 한 번도 나로 안 살아본 것 같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직장에서는 적당히 화합하기 위한 모드로만 살아왔다. 나는 남이 늦었다고 할 시기에 어떤 시작의 자리에 섰다. 이제야 비로소 나로 살아볼 용기를 내본 것이다. 그냥 오늘 하루를 산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되어가는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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