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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안 May 03. 2023

나의 20대는 벚꽃이었다

유달리 빨리 지는 봄에 피는 꽃들처럼 나의 20대 청춘은 그렇게 벚꽃과도 같았다. 큰 아이가 26살 2월에 태어났으니 20대의 젊음과 자유는 고작 5년 누리는 것에 그쳤다. 휴학 1년 후 복학해서 스무 살부터 대학 1학년을 1년 후배들과 함께 다녔다. 학교 앞 레스토랑에서 알바를 시작해서 5시부터 10시까지 일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 3개월하고 그만두었는데, 사장님이 계속 콜을 하고 볶아대서 알바생활이 이어졌다. 또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알바를 그만두고 잠적해버리면 일주일 정도 조용하다가 나를 수소문해서 체포를 해버리는 통에 자의반 타의반 알바생이 되었다. 오래 머물다 보니 레스토랑 전체를 나한테 맡기고 사장님이 여행을 가실 정도가 되었다.    

  

내 별명은 불어를 전공해서 아가씨를 칭하는 마드모아젤에서 얼마 후 마담으로 되어 백마담이 되었다. 상대생과 법대생들이 주 고객이었는데 그들 중의 누군가가 백마담이라고 큰 소리로 부른 후에 진짜 백마담이 되어버렸다. 법대생 대여섯 명이 날마다 찾아와서 죽치는 바람에 사장님과도 친해져서 불어교육과 여학생들 2~3명과 법대생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인 다른 단과생들 몇몇이서 동아리처럼 모임이 만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철학 나부랭이 이야기를 하며 설전을 몇 시간씩 벌이기도 했다. 물론 항상 결론이 나지 많았다. 누구도 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한 술 더 토론을 좋아했던 중년의 사장님은 우리의 고문 역할을 자처하며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그들의 삼시세끼와 커피 타임을 다 공짜로 제공했다. 한 마디로 빈대모임이었다.     

법대생 중의 한 명이 지금의 남편 친구였다. 나를 보러 날마다 레스토랑에 찾아와서 콜라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씩 앉아 있던 남편도 그 멤버로 승격되었다. 어떻게 사장님을 구워삶았는지 디제이박스를 남편이 담당했다. 난 그때 법대생 중의 한 명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남편이 공공연하게 나에 대한 감정을 공표하니까 다들 남편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그 법대생과 나는 서로에게 호감이 있으면서도 뭔가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워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얼마 안 가 풋사랑의 불씨는 피지도 못하고 사르르 꺼져버렸다. 남편을 중심으로 한 호위무사들이 쟁쟁하게 버티고 있으니 그 법대생은 휴학하고 경기도에 있는 고시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달랑 편지 한 장만 보내왔다. 내 마음은 정확히 알고 있었나 보다.     

그 뒤로 남편을 엄청 미워했다. 근데 미워하든지 말든지, 냉정하게 굴든지 말든지 나의 태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넌 나에게 시집오게 되어있어." 맨날 이런 황당무계한 말만 뿌려댔다. 이 사람이 스토커의 원조다. 그러면 사장님은 무조건 남편의 편만 들었다. "이런 사람 없어, 이런 사람이 진국 남편감이야." 

지금 그 사장님은 아직도 우리 모임의 고문이신데 내가 많이 미워하는 중이다. 왜 미워하는지는 다 짐작하시리라.    

 

그렇게 그때의 모임 멤버들은 단 하루라도 안 보면 안 될 사람들처럼 날마다 수업이 끝나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법대생인 남편의 친구가 제일 토론에 능해서 그 사람을 당해 낼만큼 논리력을 갖춘 사람이 드물었다.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어 책을 씹어 먹다시피 도서관에서 며칠 머리 아프게 읽은 다음 딱 한 번 승리의 쾌감을 맛본 것 같다. 시인을 꿈꾸며 항상 아름다운 언어로 우리 영혼을 세탁해주던 국문과 청년은 나중에 국세청 공무원으로 들어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와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가장 부드러운 것은 가장 강하기도 하다는 것을 그가 보여주었다. 모두 그렇게 열심히 놀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공부했는지 졸업 후에 다 제 갈 길을 잘 찾아갔다. 능력쟁이들이다. 


그 후 나는 새로 바뀌어진 사장님의 제의로 대학 4학년 때 레스토랑의 월급사장이 되었다. 과 교수님들이 홍보를 잘해주셔서 교수님들 모임이나 행사 때 많이 찾아 주셨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사이드길을 가는 나를 우리 과 교수님들은 맨날 대단하다고 하셨다. 가장 젊으신 총각이시면서 시와 기호학 전공이신 서울대 출신 교수님이 계셨는데 개인적으로 그분의 강의와 전문영역에 호기심이 생겨 대학원 진학을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 그 교수님도 내가 공부하기를 바라셨다. 근데 나는 돈 벌며 일하는 것을 택했다. 우선 눈앞에 닥친 일들이 너무 잘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였던 고등학교 동창은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었다. 내가 결혼해야겠다고 말했을 때도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한 유일한 친구이다. 한참 지나서야 깨달았다. 친구 말을 들을 걸.....    

 

나의 20대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남이 깔아놓은 바둑판 위에서 바둑알이 된 인생이었다. 그것은 내 안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한 비바람을 견뎌낼 만큼 단단하지 못하고 잔잔한 애기 바람에도 금방 스러질 벚꽂에 지나지 않았다. 잠깐 빛나고 화려했을 뿐이다. 그래도 그때가 있어서 30대, 40대...그 후의 세월을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반석이 되어준 나의 20대에 감사하다. 어설프고 아쉬움이 많고, 지금이라면 그런 선택을 안 했을 것 같은 순간도 많지만, 그것들이 다 혼재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다 감사할 뿐이다. 싱그러운 스무 살, 20대가 나에게도 있었다. 오랜만에 기억을 꺼내 보며 행복에 잠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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