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3개월여 담임을 맡아 지도했던 학부모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목소리도 울먹이고 있었다. 4학년 아들이 학교에서 같은 반 여자아이의 학부모로부터 학폭으로 신고가 되었단다. 그래서 자신도 학폭으로 대응하셨다고 했다. 원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그랬단다.
들어보니 아이들의 티격태격이 빨리 해결되지 않아 서로 앙금이 쌓였고, 또 이것을 각자의 부모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도 생겼다. 그렇게 일을 크게 키울 것도 아니었다. 성장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어른들이 제때 해결을 못 한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에 상앙이라는 법가 정치가가 있었다. 처음엔 엄중한 법으로 사회적 제도와 기틀이 갖춰져 편리해 보였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일상을 너무 제약한 나머지 사람들은 불편을 느끼며 상앙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들과 아버지가, 또 형제간에도 한방에서 자는 것을 금지했다. 유언비어를 양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가족이 함께 자는 것을 금한 것이다. 이 정도였으니 그 법의 딱딱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상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상왕이 마지막에 왕의 군대에 쫓기다가 어느 객사에 들려 하룻밤을 청했는데, 객사 주인 왈, "상앙의 법에 따르면 여행권이 없는 사람은 잠을 재울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그때에야 뒤늦게 법의 폐단을 느끼며 상앙은 탄식했다. 요즘 우리 사회도 걸핏하면 법 대로를 따지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판 상앙이 여기저기 날뛰니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요즘의 학교 변화를 보며 상앙이 있던 시대가 겹쳐 보여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교권이나 다른 학생의 학습권보다도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이기적인 부모를 둔 아이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진다. 단 한 명의 인권만 중시하는 법적 판결 때문에 교사들은 의기소침해진다. 학교에서 일이 발생했을 때 교사가 적극적인 해결자로 나설 수 없는 것이 교육계의 현실이다.
교사의 지도가 없는 교실은 밀림의 축소판이다. 무질서 자체다. 툭탁툭탁, 티격태격 다툼이 잦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내 자식만 소중하다는 치우친 모성들까지 합쳐지면 사소한 일도 학폭으로 접수된다. 여기저기서 다 법을 따진다. 이런 간접 경험이 학습이 된 건지 학교 생활의 증거를 차곡차곡 모아둔 모범 여학생의 웃픈 사례도 있다.
오죽 마음을 다쳤으면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포스트잇에 낱낱이 써 놨을까.... 다른 학부모님은 이 아이의 그 자료로 자신의 아이 학폭 증거로 삼을 수 있다며 기특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폭을 지금처럼 키우지 않으려면 차라리 학교당 파출소 하나가 함께 있어야 한다. 교사가 허수아비가 된 지 오래인데,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은 누가 지도하겠는가. 경찰들이 학교에서 경계를 서 줘야 그나마 학교가 잠잠해지지 않을까. 감히 예전 같으면 가당치 않을 상상을 하게 된다. 학교의 존재감은 그만큼 퇴색되었다.

서로 대화하고 인간적으로 조율하기 전에 무조건 신고부터 하고, 법으로 따지기 위해 증거와 증인을 챙겨야 하는 냉정한 세상을 우리 아이들이 보고 배우고 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아이들의 발달 단계상 아이들은 상상력이 왕성해서 거짓말도 눈동자 하나 안 움직이고 할 때가 있다. 아이들이 다 똑같다. 선생님이 간파하면 바로 인정하고 꼬리 내린다. 그러나 대개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거짓말을 밝히지 못하고 연구실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본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만은 천사인 줄 안다.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굳건한 믿음 때문에 모든 상황 판단을 자신의 아이 말을 기준으로 한다. 아이가 교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친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과는 상관없다. 그 성장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의도성 없이 그냥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 일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부모와 교사, 함께하는 어른들의 지혜로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이에게만 공부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부모도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공부해야 한다. 인디언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마을 어른들이 함께 키워야 하는데, 지금은 자신의 아이만 챙긴다. 사람들은 네크워크 안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다. 멀리 보면 내 자식만이 옳고 최고라는 관점은 결코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아이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학급 아이들 전체를 대상으로 조사를 해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린다고 했다. 일명 전수조사를 한단다. 누가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꼭 그렇게 해야만 할까? 누군가 관여해서 중재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아이들의 동심만 상처 입고 편 가르기 문화가 만들어진다. 교사가 자칫 잘못 개입했다간 도리어 한쪽 편만 들었다며 원성을 사기도 한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나는 그 아이들과 반 아이들이 겪을 일이 안타까워서 두 학부모님을 중재했다. 휴직하여 잠시 학교를 나가 있는 내가 오지랖을 부렸으니 학교 측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두 분 이야기를 듣고 오해되지 않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진이 다 빠졌다.
결국 학폭에 관계된 두 학부모님은 서로 대화를 나누시고 학폭 접수를 취소하기로 결정하셨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서 분리 조치를 받고 진술서를 쓴 아이들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일이 커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둘 다 품성이 바른 아이들이었는데도 제때 감정의 물꼬를 터주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다.
어른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어른이라고 완성된 존재는 아니다. “어쩌다 어른”이란 말에 깊이 공감한다. 시간에 떠밀려 어른의 대열에 들어선 것뿐이다. 어른도 어른 됨을 꼭 배워야 한다. 아직 내 안에 미성숙한 채 남아있는 ‘어린 아이’ 를 돌보고 가르쳐줘야 한다.
제대로 많이 알수록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고, 우리는 관대해질 수 있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걸핏하면 법으로 가져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상앙이 현시대에 살아 돌아온다면 규율에 맞춰 “법대로”를 외치는 이 사회에 한마디를 던지지 않을까?
“나는 너무 늦게 알았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그대들은 제발 법! 법! 하며 살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