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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읽으라고 하지 마세요

by 백지안

주영이는 1학년과 2학년 연이어 내가 담임을 맡았던 아이다. 지금은 5학년이다. 2년이나 함께 지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워낙에 보석 같은 아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


담임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 이런 아이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순둥순둥하고 공부도 잘하며 친구들과도 조용히 잘 지낸다. 게다가 하나를 말하면 서너 개를 센스있게 처리하는 것까지 진짜 보석이라는 표현 외에 다른 것은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


개인적으로 학생들의 독서와 글쓰기를 강조해서 지도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잘 따라와 줬다. 목표 이상의 책을 읽어냄은 물론이고 글쓰기 또한 잘했다. 한 번씩 내게 보내주는 사이다 같은 쪽지는 절로 미소를 머금게 했다. 주영이 어머니는 딸 하나만 키우는 데에도 이기적이지 않게 잘 키우셨다.


문제는 책 읽기와 같은 정적인 것만 하다 보니까 운동 감각이 길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하는 기본 줄넘기도 잘못했다. 아이들은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해도 자기가 못하는 것 앞에 서면 갑자기 소심해지고 금방 기가 죽는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는데도 아이들은 못하는 것 앞에서는 의기소침해졌다. 인간 유전자에는 자기가 최고여야 하고 자신은 자기가 인정하는 수준까지는 잘해야 된다는 그런 욕구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못하는 것 앞에서는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주영이는 체육시간만 되면 몸이 움츠러들었다. 피구 게임을 하면 공을 잡으려 하지 않고 항상 한 쪽으로 피해 다녔다. 줄넘기를 하면 몇 개 못하고 발에 걸린다. 그럼 담임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낸다.

이럴 때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연습뿐이다.


“몸으로 하는 것은 익힐 때까지 연습밖에 없단다.”


주영이는 몇 번 뛰다 말고 안되면 얼굴 표정에 포기라고 쓰여 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더 안되는 것이다. 익히려면 무엇이든지 반복하고 연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책 읽기를 많이 좋아하는 아이일수록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

주영이에게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어머님께 운동능력을 따로 키워줘야 근성이 길러진다고 조언해 드렸다. 태권도장이라도 보내면 아이에게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주영이는 여러 면에서 모범적이니까 크게 신경 쓸 것이 없었지만 오히려 책을 읽느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기에 육체적인 강함을 길러줄 필요가 있었다. 사실 어른도 운동을 하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면서 생활이 잡혀진다. 더구나 인내심도 길러진다. 아이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교사들은 한 학교에 오래 있지 않고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다른 학교로 전보 발령을 받는다. 나도 주영이가 4학년이 되던 해에 그 학교를 떠나왔다.



올해 주영이는 5학년이다. 여자아이들의 사춘기 포스가 한참 물이 올라서 서로 간의 갈등이 장난이 아닌 때다. 반 분위기를 부드럽게 통솔해서 별 탈 없이 잘 유지해가도 바깥에서라도 꼭 한번은 문제가 터진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어서 아이들이 학급 아이뿐만 아니라 학원에서 만나는 친구들하고도 카톡이나 단톡방으로 연결해서 지내다 문제가 생긴다.


주영이 어머님이 오랜만에 전화로 상담하셨다. 아이가 친구 문제로 너무 힘들어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주영이는 반 여자아이하고 문제가 생겼다. 모든 것을 앞서가고 잘하는 주영이가 시샘의 대상이 된 것 같았다. 영악하게도 상대 아이는 처음에는 친하게 잘 지내다가 한 번씩 주영이를 은근히 따돌리고 모른 척하며 괴롭힌다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그래왔는데 주영이는 그럴 때마다 당하고 참다가 또 그 상대방 아이가 다가오면 받아주었다.


주영이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책만 보고 공부도 잘해서 여러 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운동은 하냐고 물어보았다. 학원 다녀야 해서 운동할 시간은 없다고 했다.

아... 이럴수가... 안타까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책을 많이 읽어 인성이 잘 형성된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같은 연령대의 아이들이 다 같으면 좋으련만 어디 그러겠는가. 부모의 교육방식과 가정환경에 따라 유독 천차만별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초등학교 교실이다.


책만 읽혀 키워서는 절대 안 된다. 고대 그리스나 아테네의 학자들이 귀족의 자녀 공부에 체육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근성을 길러주는 운동을 어린 시절엔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현장에서 주영이 같은 아이들을 보며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머리로 하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다. 몸으로 익히는 것도 공부다. 두 개의 밸런스를 갖춰 나가는 것이 진정한 공부다. 주영이 엄마에게 그렇게 상담해 드렸지만 잘 해결되어 지내고 있다며 문자만 하신 것을 보면 내 조언을 따른 것 같지는 않다. 주영이와 주영이 엄마의 심성으로 보아 포기나 인내를 따랐을 것 같다.



학교도 사회고 교실도 사회다. 사회는 결코 녹록치 않는 곳이다. 아이들이 왜 공부를 하는가. 미래를 위해 자신을 잘 준비시키는 과정에서 하는 공부다. 책도 안 읽는 아이들에 비하면 책을 많이 읽는 주영이가 훨씬 훌륭하지만 지금 주영이가 있는 곳에서는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없다. 유유상종의 무리로 가기 전까지는 그런 일을 겪을 것이다.


공부도 삶도 일도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한다. 책만 읽는 삶은 뜬구름 잡는 이상적인 생각만 하게 되어 적절하게 현실에 대처하지를 못하게 된다. 자칫 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삶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아름다운 미덕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방어력을 갖출 수 있는 깡심, 인내심, 자신감 등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운동으로 키울 수 있다. 만약 주영이가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마냥 참지만 않고 단 한 번만이라도 태권 격파 실력을 보여줬더라면 (그런 실력이 있었다면, 운동을 배웠다면) 함부로 주영이를 대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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