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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안 Feb 25. 2023

내가 가진 또 하나의 거울


 TV프로그램 금쪽이 상담소의 히로인 오은영 교수님의 『화해』라는 책이 있다. 외면하는 마음에 대해 마주볼 수 있는 용기로서의 화해를 말하고 있다. 그 마음은 나의 여러 자아일 수 있고 부모의 마음, 또 다른 마음일 수도 있다. 나도 그 화해를 하지 못해 긴 세월을 웅크려 살고 있었다.




 난 좀 새침한 성격이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좋고 싫음이 얼굴에 바로 나타나서 마음을 숨기거나 꾸미지도 못한다. 게다가 말도 많지 않고 다정다정하지도 않다. 시세말로 좀 밥맛인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원래 마음이 찬 사람은 아니다. 그저 표현력이 부족하고    남들한테 곰살맞게 대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나 할까.




 이런 성격으로 20대 중반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친구들 중에서 제일 빨리 결혼을 했다. 날이면 날마다 고개를 돌리면 항상 내 옆에 있는 남자가 있어 변변한 데이트나 연애기간도 없이 그렇게 되었다. 포장마차에서 한 잔하고 그만 쫓아다니라고 바리바리 악을 쓰고 난 후, 그래도 떠나지 않으니 찐이다 싶어 결혼을 했다.




 엄마가 될 계획도 준비도 없던 나는 그렇게 덜컥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을 만나도 예뻐 하지도 않았고 표현도 덤덤하기만 한 내가 엄마가 되었으니 정말 큰일이었다. 그런데 내 아이를 볼 때마다 가슴에 무지개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는 나의 아이가 너무 너무 사랑스럽고 예쁜데 그 표현을 하는 것이 쑥스러웠다. 그래서 여러 육아책을 뒤적이며 아이  키우기 공부만 했다. 마치 연애를 책으로 배우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안고 그냥 그림책만 보여주었다. 아이가 잠들면 턱을 괴고 한참을 눈에서 꿀물 떨어지게 바라보면서도 막상 깨어나면 아이와 어떻게 놀아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만 했다. 큰 아이가 돌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내 얼굴의 표정 근육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덧 아이를 보면 더 잘 웃고 더 말도 스스럼없이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오남매의 맏이로, 엄하게 교육받았다. 어릴 때는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히 못했다. 하도 억울하거나 답답해 말을 하면 말대답이라고 못을 박아 호통을 치는 통에 말 할 엄두를 못 냈다. 꾹꾹 눌러 할 말을 삼키다 보니 항상 마음이 공허했다. 동네 잔칫날, 온 가족은 잔치집에 가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는 것 같은 쓸쓸함이 나를 따라 다녔다.



 나중에 아이 엄마가 된 다음 우리 엄마에게 왜 그렇게 나를 엄하게 대했냐고 물어보았다. 외할머니의 “자식을 속으로 사랑해야지 겉으로 대놓고 이뻐하면 자식을 버리게 된다.”고 하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맏이인 나에게 더 엄한 잣대를 두었다고 하셨다. 속마음은 안 그러셨다고 하셨다. 지금은 팔순이신 엄마를 보고 있노라면 끊임없이 여러 통로를 통해 인생을 배우고 성찰하시는 것 같다. 나 또한 일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 우리들에게 배움과 깨달음은 늘 진행 중이기 때문 이리라. 나이 육십을 바라보는 딸을 잔잔하게 챙기는 엄마를 보면서 지나간 시간에 대한 엄마의 아쉬움을 가슴으로 느낀다. 내가 아이를 키울 때도 항상



 “아이들은 잘못 없어. 다 어른의 잘못이야. 아이들에게 잘못할 원인을 제공해서도 안되고 아이들을 방치해서도 안 된다.”


고 말씀하셨다. 나에겐 남동생 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 둘이 있다. 예전에는 남아 선호 때문에 아들을 대하는 방식이 딸을 대하는 것과는 좀 달랐다. 아들들은 아들이라 귀하게 대하셨고 아래의 여동생 둘은 엄마가 더 나이 들어 낳으셨기 때문인지 내리 사랑을 그냥 표현하셨다. 스물 하나의 젊은 엄마는 육아가 낯설어서 첫 아이인 내가 버거웠고 아이들을 키워가며 배워 가셨을 것이다. 어쨌든 엄마를 계모로 상상하며 자라면서 누구에게도 잘 마음을 열지 못하는 차가운 성격이 되어간 것이다. 그랬던 내가 아이 엄마가 되자 내 안에 꽁꽁 얼어있던 사랑들이 녹아 흐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화해가 드디어 나를 향해, 또 우리 엄마를 향해 이루어졌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면서 나의 행복이 커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아이가 소중하니 이웃의 모든 아이들도 다 소중해 보였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웃게 되고 나도 모르게 애정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이제 나는 아들 둘, 딸 하나,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결혼한 지 한참 지나서 대학 후배를 만났는데 "언니 인상이 많이 달라졌어! 얼굴이 따뜻하고 편안해 보여" 이러는 거였다. 다 아이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나를 성장시켜준 것이다. 자기 밖에 모르고 세상에 닫혀 있던 사람을 타인을 품을 줄도 알고 따뜻함을 표현할 줄도 아는 사람으로 변화 시켜준 것이다. 때로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나태해지고 싶고, 힘든 일을 마주할 때면 회피하고 싶어도 아이들이 나를 보고 배울까 봐 내 자신을 다시 추스를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빠른 결혼과 육아를 한 나에게 인생 선배라며 친구들이 가끔 상담을 해오면 내가 늘 자주 쓰는 말이 있었다.



" 아이들은 우리의 감독관이야. 아이들은 우리의 거울이기도 해."




그 말은 정작 내 자신에게 늘 들려주던 말이기도 했다.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난 아마 철도 안 들고 새침데기인 골드미스가 되었을 거다. 




 이제 성인이 된 나의 아이들은 내가 자기들에게 했던 방식으로 지금은 이 엄마를 키우고 있다.




가정이 중간에 어려움을 겪을 때 의젓하게 그 짐을 나눠 진 큰 아들 첫째에게는 부모로서 미진함이 있다. 부모 역할도 처음인데 연습도 없이 생방송 무대에 오른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첫째 아이에게는 항상 나의 미성숙에서 오는 미안함이 있다. 자상하고 속 깊은 큰 아들 덕에 어두운 터널도 지나올 수 있었다.



갱년기가 시작되어 우울감으로 힘들 때 딸의 계획으로 딸과 단 둘이 하노이의 거리를 걷고 왔다. 엄마의 변화를 귀신처럼 눈치채고 급처방에 나선 것이다. 지금도 다소 이상주의자인 엄마의 실책을 현실적으로 잘 코치해 주고 있는 듬직한 딸이다.



막내는 엄마의 힐링 마스터다. 엄마의 감정 상태를 잘 읽고 때에 맞는 말들로 엄마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지난해 대상포진을 앓고 다 나을 무렵 코로나 예방접종을 했다. 그랬더니 대상포진이 재발되어 엄청 고생을 했다. 직장도 못 나갈 정도였다. 직장 일로 마음 불편해 하고 있을 때 막내 아들은 나에게 말했다.




"엄마 지금은 병캉스야. 아플 때는 휴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해야 빨리 나아요."




때론 외출할 때면 멋지게 꾸미고 엄마를 급하게 찾는다.




"엄마 어때? 잘 생긴 아들 보니까 엄마 눈이 시원하지?"




그러면서 휭하니 문을 열고 나가 버린다. 막내가 사라진 자리에 미소만 남는다. 우리집에서 비쥬얼 담당인 막내는 가끔 그런 말로 엄마를 웃게 효도한다며 우긴다. 




 이렇게 나의 세 아이들은 나에게 힘이 되어준다. 언젠가 읽은 가재산님의 『아름다운 뒤태』에서도 애들은 어른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며 애들은 어른의 거울이라고 했다. 살아가다 보면 늘 따사한 햇살이 비추는 봄날일 수만은 없었다. 때로는 폭풍우도 불고 추운 겨울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삶의 자양분이 되고 삶의 근육을 키우는 성장통이 되어 주었기에 함께 한 모든 날들에 다 감사할 뿐이다. 세 아이는 반짝거리는 내 삶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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