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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opal Dec 28. 2018

예술의 자유,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행위예술에 대하여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들고, 연기를 하기도 하고, 조각을 하며 알 수 없는 물질을 결합해 설치작업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생각과 철학을 이러한 매체들을 통해 자유롭게 표현한다. 우리 신체를 이용해 다른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반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예술의 범위라면, 행위예술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조금 생소한 분야일 수도 있다. 


행위예술의 사전적 의미는, ‘개념미술의 관념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육체 그 자체를 통하여 실행하는 예술행위’이다. 즉 인간이 가진 신체 그 자체를 통해 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이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비교적 최근인 2010년 MOMA 회고전 당시 행위예술가인 Marina Abramovic이 하루 7시간, 총 3달의 기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관람객을 맞이한 퍼포먼스를 펼친 적도 있었다. 

‘시선의 체험’이라고 불려진 이 퍼포먼스는 관람객이 본인을 마주하는 순간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한다. 이처럼 다소 얌전한(?) 행위예술도 있었지만, 파격적인 행위예술로 보는 이들을 모두 놀라게 한 행위예술도 많이 존재한다. 



Tom Otterness – Shot Dog Film


1952년 생인 Tom은, 1977년 그가 25살일 때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했다. 그리고는 나무에 강아지를 묶은 후 총을 쏴 그 강아지를 죽였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녹화해 Shot Dog Film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냈다. 이 영화는 타임스퀘어 극장과 맨해튼 케이블 TV 등 규모가 큰 곳에서 상영이 되었으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다. 


이후 (당연하게도) 동물 보호협회가 그에게 그가 해당 동물을 위한 보상금을 내거나 최소한 사과를 하기를 요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Shot Dog Film은 사람들 기억에서 잊힌 후 Tom은 세계적인 조각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미지 출처: http://www.humanearts.org/2018/03/22/when-tom-otterness-killed-a-dog-in-the-name-of-art/

그의 조각은 서울 광장을 비롯해 토론토, 뉴욕,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되었다. 이후 20년 이상 Tom이 만들었던 Shot Dog Film에 대해서 언급된 기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Carolee Schneemann – Meat Joy


Tom이 충격적인 영화를 찍기 훨씬 이전인 1964년, 예술가 Carolee는 ‘Meat Joy(육체의 환희)’라는 주제의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그녀의 ‘육체의 환희’에서는 옷을 거의 입지 않은 남녀 8명이 안무를 하며 무대 위에 쏟아진 페인트와 종이 그리고 생고기에 몸을 비벼댄다. 


https://youtu.be/s4i4hLtqLOs

이 퍼포먼스는 파리 American Center에서 열린 Free Expression 축제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이후 뉴욕에 Judson Memorial Church에서도 행해졌다. 그녀는 성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타파하고 금기를 침범함으로써 몸의 활력과 성적인 힘을 더욱 단단히 시키는 것이 이 퍼포먼스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Milo Moire - PlogEgg


이 퍼포먼스는 다소 충격적일 수 있다. 2014년 발표된 이 행위예술은 예술가인 Milo가 직접 페인트가 담긴 달걀을 자신의 질 속에 넣어 잭슨 폴락과도 같은 추상적인 페인팅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생명 탄생의 순간인 출생을 모티브로 여성이 할 수 있는 창조의 힘을 생각해볼 수 있는 퍼포먼스(라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wKFZOIv5sS0&feature=youtu.be&has_verified=1


이 외에도 Adrian Parson의 라이브 포경 수술 퍼포먼스, Deborah de Robertis의 자신의 음부를 드러낸 작품인 ‘세상의 기원’, Voina의 난교 퍼포먼스 등 실제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행위예술로서 표현한 이들은 굉장히 많이 존재한다(더 심한 것도 있지만, 우리의 비위를 위해 생략했다).


특히나 2015년 69세의 나이로 타계한 크리스 버든의 경우 친구에게 총을 쥐여준 후 크리스 자신에게 총을 쏘라고 하기도 했고, 학창 시절에는 가로세로가 겨우 60cm밖에 되지 않은 락커 안에 스스로 몸을 묶고 무려 5일 동안 자기 감금을 하기도 했다(그와 관련된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도 있다. 궁금하다면 한번 보기를 추천한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버든: 잔혹의 매혹

행위예술은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인간의 신체를 사용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때로는 성적이거나, 스스로 상해를 입히는 등의 잔인한 방법으로 예술가의 사상이 표현되기도 한다. 예술이라는 의미 안에 자해나 자위를 하면 안 되며, 다른 사람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성적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라는 법과 같은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행위예술을 보는 관찰자 입장에서는 일상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들을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이해가 가지 않은 행위라도 그 안에 심오한 뜻이 있으면 되는 것일까? 그 뜻에 공감해서 고개를 끄덕거리면 그 행위들이 예술로서 납득되는 것인가? 살인이나 반인륜적인 행동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이라면 모두 표현의 자유로서 존중받아야 하는 것인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위와 같이 불편한 장면이 나올 때 눈살을 찌푸리게 될지는 몰라도 그러한 장면들 때문에 영화사나 감독을 소송하지는 않는다. 연출된 장면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잔인하긴 해도 영화 내 스토리 상 꼭 필요한 부분으로 간주되어, 우리는 장면을 쪼개서 나눠보지 않고 영화가 가진 하나의 스토리의 흐름으로서 각 장면들을 이해한다. 


자신의 귓볼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통해 반정부 감정을 드러낸 러시아 행위예술가 이미지 출처: Facebook/Oksana shalygina


행위예술은 어떨까? 행위예술 또한 하나의 ‘연출된’ 상황이다. 더군다나 영화가 가진 철학보다 최소한 각 예술가들이 표현하려는 사상과 철학이 굉장히 심오하고 깊다. 우리가 단순히 수위가 센 행위예술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은 수위의 문제에서만 발현될까? 아니면 다른 요소들도 많은 것일 까. 


행위예술이라는 전체적 콘텐츠에 거부감을 가지는 건 아니지만 일부 특정한 행위예술을 통해 이미지가 재고되는 건 분명할 것이다. 어느 일정 수준 이상의 미학을 느꼈을 때 우리는 그것의 장르를 불문하고 ‘예술이다’라는 표현을 쓴다. 사람마다 개개인의 기준에 부합하는 미학을 느꼈을 때 해당하는 것이지만 행위예술을 볼 때 이 표현은 잘 쓰게 되지 않는 것 같다. 


내 개인적인 미학의 기준이 너무 높은 건지 혹은 너무 낮은 건지, 행위예술을 통해 우리가 가슴 깊이 예술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것이 바뀌어야 하는지, 우리가 바뀌어야 하는지 조차 모호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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