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역할_2
꽤나 흥미로운 책을 최근 읽었다. ‘미술관 100% 활용법’이라는 책인데, 제목 그대로 우리가 어떻게 미술관을 활용해야 하는지 제안하고 있다. 책 구성도 특이한데, 간혹 미술관 바닥에 실제 붙어있는 동선 안내 화살표 스티커처럼 책 안에서도 독자가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는지 안내하고 있다. 읽다 보면 결국 저자의 뜻대로 그 안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서 없이 뒤엉켜 읽은 후 전체 맥락을 파악하게 된다.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결국 저자가 의도한 바는 이처럼 미술관에서 주는 정해진 틀을 깨 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사실 미술 순수 주의자라면 질색을 할 제안들이 이 책 안에는 수두룩하다. 저자는 미술을 만져보라고도 하고(물론 합법적으로), 아이와 함께 가 순수 비평가인 그들과 함께 미술을 감상하라고도 하며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해보라고도 한다.
이것이 작품에 대한 생각과 시야를 넓히는 데에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겠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결국 미술관 혹은 갤러리에서 가져갈 수 있는 궁극적 경험에 대한 이야기라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식당에서는 미각과 시각적, 서비스에 대한 경험을 얻을 수 있고 서점을 가면 서점 자체에서 책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구매하지 않아도 책을 읽어볼 수 있게끔 테이블을 들여놓아 책과 더불어 공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안하고 있다.
그에 반해 갤러리나 미술관은 어떨까? 음악이 틀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는(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과) 더더욱 아니다. 어찌 보면 볼 것이라고는 그림 밖에는 없는 다소 숨 막히는 이 공간에서 정말 우리는 그림만을 보며 무지막지하게 새로운 경험을 얻어야 하는 걸까? 애초에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잠깐 예전으로 돌아가 보면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려지는 폴 세잔이 활동했던 시기, 프랑스 살롱은 위 그림처럼 그림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당시 모네, 르누아르 등 유명 인상파 화가들이 이러한 살롱에 입상하여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 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는 없겠지만,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을 보면 프랑스 살롱이 자주 나오곤 한다. 그 장면에서 살롱은 굉장히 시끄럽고 분주하다. 그림에 대한 생각과 비평을 거침없이 퍼부어대고 그림과 그림을 비교하며 누가 상을 타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오히려 인터넷이 나오기 한참 전에, 전시장은 우리에게 이미 많은 정보를 주고 있는 거대한 정보 공간과도 같았던 것이었다. 위 사진처럼 중간엔 의자가 놓여 있어 몸을 편안히 하고 그림을 오랫동안 볼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의자가 치워지고, 거의 같은 관람 형식이 미술관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림과 아티스트가 매우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콘셉트는 오히려 보편화된 느낌이다. 그림과 작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지 않은 이상은 우리는 미술관에 그림을 ‘경험’한다기보다 ‘감상’하러 가는 축에 속한다.
미술관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많은 의견이 갈리겠지만, 나는 대체로 미술관은 대중들에게 좀 더 미술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야 하는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책임감으로 다양한 아티스트들을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해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미술관’ 하면 펀하고 익사이팅한 곳이라기보다 좀 더 고루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건 여전히 그 형식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순수 주의자들을 배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최소한 미술관이 많은 대중들을 수용하게 되면서 단순 감상보다 어떠한 경험을 부여해줄 수 있는지 공간 그 자체로서 좀 더 그 역할을 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관 100% 활용법처럼, 관람객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행동을 유도하게끔 만드는 것도 미술관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제안하는 방식처럼 우리가 미술관을 충분히 활용하게 될 수 있는 시점이 온다라면 미술관은 더 이상 고루하고 재미없는 곳이 아닌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 차, 가는 사람 두근두근거리게 만드는 곳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