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별 게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딸아이가 6학년의 졸업식을 앞두고 꽃다발을 포장하는 일을 맡았는데, 남은 꽃을 들고 가도 된다고 했다 한다. 아이가 들고 온, 하얀 소국 한 대와 이름을 모르겠는 커다란 꽃 두 송이.
이상하다. 그걸 보는데 왜 그리 기분이 설레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걸어오는 그 사이 행여나 시들까 싶어 서둘러 꽃을 꽂아둘 만한 녀석을 찾는다. 꽃 하고는 워낙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으니 변변한 꽃병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여기저기 뒤지다가제법 꽃병처럼 보일만한 물병을 찾았다. 얼른 물을 받아 꽂아놓고 보니 어라, 꽤 잘 어울린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한번 쓰윽.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한번 쓰윽.
밥 먹다가도 한번 쓰윽.
자꾸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고, 나도 모르게 실실 미소가 지어진다. 괜히 한 번 만져보고, 세 개 밖에 안 되는 꽃대들을 요래 저래 다시 꽂아 보곤, 꽃병을 좌우로 1cm씩 옮겨도 본다.
내가 이렇게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가.
양희은이 그랬다지. 젊은 애들이 꽃이 예쁜 줄 모르는 건, 지들이 꽃이라 그렇다고. 그 말을 들을 때 우리 엄마가 생각났더랬다. 베란다에 핀 꽃만 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던 우리 엄마. 그리고 꽃이 만발한 봄날이면 꽃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또 다른 엄마들. 그 모습 위로 좋다고 꽃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겹친다.
생각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오랫동안 날 기쁘게 했던 꽃은 시들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꽃이 있던 자리는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나를 위한 꽃을 사러 꽃집에 가기에 이른 것이다. 다른 이에게 별 거 아닐지 모르는 이 작은 행동이 사실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다. 낯선 곳, 내가 모르는 곳에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아니던가.
소심하게 꽃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화분은 사본 적 있어도 꽃을, 게다가 나를 위한 꽃을 사는 건 처음이다. 어떤 꽃을 어떻게 사야 하는 건가?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너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 쭈뼛거리는데. 선반 위에 올려진 후리지아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렇지. 봄에는 후리지아지.
“후리지아는 어떻게 해요?”
“열대에 8천 원이에요. 포장 안 하시면 7천 원이요”
“그냥 집에 꽂아놓을 거예요”
“그럼 7천 원에 드릴게요”
아직 봉오리인 녀석들을 하나하나 골라 무심한 듯, 습자지위에 내려놓고, 노끈으로 휘휘 묶는데 아, 이 녀석. 뭐가 그리 이쁜지 모르겠다. 그래. 자고로 꽃이란 그런 거지. 신문지로 둘둘 싸매도 꽃은 꽃이지. 꽃이면 충분하지.
꽃다발을 들고 오는 내내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모른다. 예전에 ‘꽃을 든 남자’라는 화장품 이름을 참 잘 지었다 싶었다. 꽃을 든 사람은 여자든 남자든 시선을 끈다. 참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에 보는 사람도 잠시, 행복할 수 있다. 지금 나도 누군가에게 잠깐, 행복을 줄 수 있을까?
내친김에 작은 화병도 하나 샀다. 없는 솜씨를 최대한 부려 후리지아 열대를 삐죽빼죽 최대한 자연스럽게 꽂아 본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게 한 송이씩 피어나는 게 어찌나 이쁜지 모른다.
여자는 나이 들면 꽃다발을 사들고 오는 남편에게 이게 얼마냐며, 차라리 돈으로 달라며, 돈다발이 아니면 들고 오지 말라며 타박을 한다더니. 그건 대체 어디서 시작된 유언비어란 말이냐.
내 나이 마흔 다섯. 꽃은 거들떠도 안 보던 내가, 이 꽃이 너무 이뻐서, 이게 웬걸. 나는 앞으로 내 돈 주고서라도 꽃다발을 사겠다, 새삼 결심할 지경에 이르렀다. 꽃이 있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건 꽃 말고는 없으니까.
분명 얼마 후면 시들겠지. 이 예쁜 꽃이 시들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때면 아깝고 속상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잠깐의 순간보다 훨씬 더 많은 행복과 기쁨을 이 녀석이 주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