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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아서 병난 여자 Feb 09. 2021

이혼의 이유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수채 구멍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뭐든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는 말은, 뭐니 뭐니 해도 머리카락에 가장 해당되는 말이다. 머리에 달려있는 머리카락이야 아름다움의 상징마저 되지만 제자리를 잃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의 상징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도 그것까진 참을 수 있다. 욕실. 으... 욕실에 있는 젖은 머리카락은 나처럼 은근히 비위가 약한 사람에게는 손끝에서 머리끝까지 닭살이 돋게 만드는 치명적인 존재가 된다.   


  발단은 그 머리카락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채 구멍이었다. 수채 구멍을 청소하면서 이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혼 13년 동안, 그는 한 번도 수채 구멍을 청소하지 않았다. 어쩌면 수채 구멍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가 수채 구멍을 잊고 있는 13년 동안, 나는 점차 비위가 강한 사람이 되어 갔다. 


  굳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면, 남편보다 머리카락이 더 길고, 더 많이 빠지는 내가 수채 구멍이 막히는 것에 책임이 더 많으니 내가 치워야 하는 게 옳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날도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아서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큰 결심을 내렸다. 나는 이제 두 눈을 똑바로 보고, 맨 손으로 머리카락을 건져내는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머리카락과 비누거품과 몸에서 나온 때와 먼지와 모든 것이 한데 엉겨 붙어 미끄덩한 것들을 들어낸다. 샤워기로 물을 한 번 뿌린 다음 솔질을 하면 미끌미끌했던 것들이 뽀득뽀득 윤기 나게 깨끗해진다. 그렇게, 분명히 수채 구멍은 깨끗해지고 있는데 내 기분은 더러워졌다.  


남편은 알까. 우리 몸에서 빠져나온 것들이 저렇게 더럽게 한 데 엉겨 붙어 있다는 것을. 

남편은 알까.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어 고개를 돌리고 구역질을 하는 내가 13년 동안 수채 구멍을 치웠기에 우리의 하수구가 막히지 않고 물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남편은 알까. 본인이 한 번도 수채 구멍을 치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남편은 알까. 우리의 결혼 생활 역시, 비슷했다는 사실을. 

남편은 이해할까. 수채 구멍에서 불공평한 결혼생활의 모습을 온전히 대면했다고 말하는 나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누군가의 처절한 노력 때문에 그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는 결혼생활이 그랬다. 당연하게 더러운 물이 흘러가는 하수구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노력했다. 그 사이 나는 많은 것들을 보았다. 


  쌓여 가는 나의 감정들. 이를테면 억울함이라든가 화, 외로움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하나 둘 쌓여 가고 물을 막고 있지만, 남편은 그것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 작은 것들을 돌아보기에 그는 너무 바빴고, 너무 큰일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내 것이니까 나는 내가 치워 왔다. 결혼의 날 것을, 결혼의 온갖 오물을 직면하고, 외면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결국 치워버렸다. 그러면 아무렇지 않게 결혼생활은 흘러갔고, 남편은 모른다. 내가 알아서 버렸다는 사실을. 아니 애초부터 그는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생활이 만든 오물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남편에게 이혼을 얘기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실제로 몇 번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있다. 상상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는 내가 말하는 이혼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수채 구멍 하나로 설명되는 그 이유를, 아무리 구구절절 온 진심과 마음을 다해 설명해도 어차피 이해하지 못한다면, 수채 구멍 때문이라고 말한 들 상관없지 않을까. 


  수채 구멍을 청소하면서 생뚱맞게 이혼을 결심하고, 그 이후로 몇 번 더 수채 구멍을 청소하며 혼자 벼르고 별렀다. 이혼의 이유를 들은 남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당해하겠지만 나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도 필요 없이 그 하나의 이유면 충분하다며 의기양양하게 그를 떠나겠다고. 


  그러다 생각도 못한 일이 며칠 전 발생했는데, 그가 욕실에 뭉쳐있는, 내가 며칠째 외면하고 있던 머리카락을 치우는,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냥 모른 체하면 될 것을 너무 놀란 나머지 ‘여보가 욕실 머리카락 치웠어?’ 라고 다시 한번 그를 상기시켜, 그가 ‘왜 이래. 나도 시간 있으면 하거든?’이라며 짐짓 뽐내는 기회까지 제공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한 번도 수채 구멍을 치우지 않아서 이혼할 거야!’라는 나의 이혼 시나리오는 심각한 맹점을 안게 되고 만다. 그가 자기가 한 그 행동을 잊어버릴 때까지는 잠시 이혼을 보류하거나 아니면 더 적합한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시간이 좀 더 걸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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