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중에서, 보쌈은 나만 좋아하는 음식이다. 보쌈이 먹고 싶을 때마다 몇 번은 그 마음을 누르고, 몇 번은 조심스레 물어봤다가 아이들 표정을 보고 포기하고,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을 때만, 강력하게 주장해 마침내 뜻을 이루곤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생각도 못한 치트키가 생겼으니, 바로 서비스로 주는 쟁반국수였다. 매운 음식을 먹게 된 아이들이 다행히 쟁반국수를 좋아하게 되었고, 아이들에게 ‘보쌈’은 ‘쟁반국수’와 이음동의어가 되었는데...
오랜만에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에게 조심스레 보쌈을 제안했다. 나는 보쌈을 먹자고 제안하면서, 아이들이 쟁반국수를 엄청나게 잘 먹는다는 것을 어필한 터였다. 보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내 미안함과 괜한 죄책감을 담은 발언이었다.
그렇게 극적으로 우리의 메뉴는 보쌈으로 타결되었고,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쟁반국수 먼저 공략했는데.
어라? 남편이 쟁반국수에 젓가락을 가져가는 것이다.
한 번. 그래~ 한입 맛보는 거야 뭐...
두 번. 어, 어라? 또 먹어?
세 번. 이 인간이 미쳤나? 내가 애들 쟁반국수 좋아한다고 말한 걸 고새 까먹었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남편이 쟁반국수로 젓가락을 가져갈 때마다 그 젓가락을 노려봤을 뿐이다.
남자들이 눈치 없게 애들 반찬에 손댄다더니 딱 그런 거구나. 난 애들이 좋아하는 음식에는 죽어도 손이 안 가던데, 가도 참게 되는데 어떻게 저 남자는 쟁반국수를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세 젓가락이나 먹을 수 있지? 기가 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쟁반국수를 먹는 남자와 먹지 않는 여자.
부성애와 모성애로 일반화, 공론화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그저 우리집의 이야기.
나는 새삼 쟁반국수를 통하여 목격하게 된 내 안의 설움을 얘기하고 싶어 졌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쟁반국수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왜 쟁반국수를 먹냐고, 엄마는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그래야 되는 줄로만 알았다. 엄마는 짜장면이 싫고, 엄마는 생선 대가리가 맛있고, 엄마는 늘 배가 안 고픈 그런 존재로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야 엄마인 줄 알았다.
아이들이 남긴 짜장면 소스에 밥을 비벼 먹고(그래도 맛있다는 건 함정), 아이들을 발라주고 남은 생선 찌끄래기를 먹고, 내가 먹고 싶은 음식 대신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나는 종종 서러웠다.
그런데 이 남자를 보라!
쟁반국수를 겁 없이 먹고, 자기도 스팸을 좋아한다면서 스팸을 더 구우라고 성화인 이 남자는, 딱 애들 같다. 그래서 설움이 없다.
한 때는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쌈을 먹고 며칠 후, 우리 가족은 캠핑을 갔다.
술에 취해 먼저 작은 텐트에서 잠들었던 나는 새벽에 눈을 떠,
아이들이 잘 자는지 확인하려 텐트 문을 열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신발 세 켤레.
다음 날 아침, 텐트에서 나오기 쉽게,
남편은 언제나 나와 아이들의 신발을 돌려놓았다.
익숙하고 당연했던 그 신발이 생뚱맞게 쟁반국수와 얽힌다.
"쟁반국수를 먹지 않는 것도 사랑이다.
신발을 돌려놓는 것도 사랑이다."
겁 없이 쟁반국수를 먹지만, 신발을 돌려놓는 배려를 할 줄 아는 남편이,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도 쟁반국수를 먹어. 그 쟁반국수 몇 입 안 먹는다고 애들 큰일 나지 않아. 안 먹고 서러워하지 말고, 먹고 행복해. 네가 행복한 사랑을 해.
그 새벽. 신발 세 켤레를 보며 잠시 눈가가 젖은 나는 다짐했다.
다음부터 보쌈을 주문할 때는 서비스로 주는 거 말고, 쟁반국수 한 그릇을 더 시켜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