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잘 지내고 있니? 언제 한번 잔디나 보러 가자. 시간 되면~
왕선배님의 카톡이 왔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정장 바지에 윗단 추를 채우지 못해, 벨트로 살짝 덮은 채로 몰려오는 식곤증에 잠을 청하려 했는데.. 새소리도, 곤충의 울음소리도 아닌 ‘까똑~’, 한동안 방해가 되어 진동으로 전환했었던 저 소리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요즘같이 업무가 별로 없는 시간엔 참 반갑다.. 생각해보면, 캠핑 가서 아이들을 먼저 재우고, 조용히 밖에 나와 모닥불 뒤에서 와이프와 맥주 한 캔을 마실 때면 어두운 숲 속에서 이따금씩 들리는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를 그 소리와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까똑~
절대 강요는 없었지만 또 절대 불응할 수도 없는 저 '까똑'소리에, 짧고 명료하게 그리고 약간의 충성을 담아 ‘넵!’ 하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식사 날짜와 장소를 잡았다.
며칠 뒤..
물왕리 호수 주변에 한식당에서 도착하니,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계셨던 선배는 역시나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고지식함으로 악수를 내미셨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팔꿈치 인사나 주먹 인사가 트렌드인데, 늘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트렌드를 놓치려 하지 않기 위해 역사, 정치, 경제 전반에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 이런 인사 행위를 여전히 하시는 거 보면 영락없는 아저씨다. ^^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보통 서로의 일(WORK)과 관련된 이야기이지만, 가끔씩은 양념 치듯이 우리 둘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의 험담(?)도 하고, 그러다가 누가 보고 있지도 듣고 있지도 않음에도 지레 겁을 먹은 건지 아님 우리가 너무 착해서인지 바로 화제를 급 돌리곤 한다.
선배님은 72년생. 나는 77년생. 5년의 차이다 보니, 서로 학교에서 오고 가며 부딪힐 일은 없었지만, 처음 학교 선배, 그것도 경영대 선배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바로 90도 인사를 드리며 환한 웃음을 보여드렸었다. 서로 알고 지낸지는 14년 정도 되는데, 선배인 것을 알게 된 시간은 한 7년 정도. 정확히 절반은 선배가 아닌 고객사의 영업팀장일 뿐이었다. 사회에서 만난 자리, 그리고 갑과 을이라 칭하는 관계에서 만났으니 대학 얘기를 할 기회도 없거니와 할 이유도 없었는데.. 선배의 후배 직원과 저녁을 함께 하다가 나눈 얘기에서 정말 우연히 나와서 알게 되었으니, 그것도 한국땅이 아닌 중국 땅에 출장을 보내고 있을 때..
생각해보면 그날의 저녁식사에서 대학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갑과 을로써,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아는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전히 듣지 않는 곳에서 을이 하는 갑에 대한 적대감의 불만소리에 귀가 간지러우시면서..
중.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연락하며 지내는 친구도 별로 없고, 대학생활이라고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바깥쪽에서만 겉돌았던 나에게, 사회에서 만난 첫 선배여서 그런지 더 따르게 된 것 같다.
한국사회가 갖는 특징을 서술해 놓은 한 심리학 책에 보면, 대표적인 특징 중에 ‘관계주의’에 관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일본의 ‘집단주의’와는 조금 차별성 있게 설명되는 용어였는데, 이런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사회 때문에, 혈연, 학연, 지연 등을 챙기다가 발생되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있다고 읽은 듯하다. 어쩌면 겉돌기만 했던 내가 전시디자인 회사에서 영업을 하면서, 위에서 얘기한 관계주의의 도움 없이 맨땅에서 줄기차게 헤딩만 하며 지금 이렇게 이마에 굳은살이 가득한데, 주변에 다른 경쟁사들이 손쉽게 얻는(나름 어려운 거라고 알고 있지만, 그때는 손쉽게 보였다.) 일감을 보면서, 부럽다 못해, 생전 관심도 없던 대학 동문회 사이트를 슬쩍 들여다볼 정도로 그 ‘관계’를 갈망했던 때도 많았다. 그때 쫌 미리 와주시지.. 그렇게 갈망했을 때.. 엄청나게 충성하면서 이제 주 고객이 되었는데, 이제야 오시니.. 참, 센스도 없고, 순발력은 이미 풍만해진 그 뱃살로 가려져서인지 찾을 수가 없어 슬프기만 하다. 말해야 뭐하랴~
솔직히, 대학교 선후배라는 관계로 인해서, 서로의 비즈니스에 뭔가 이익과 불 익을 주는 경우는 없으니, 나쁜 의미의 ‘관계주의’는 아니리라.. 오히려, 선배 세대로서 나에게 전달해주는 좋은 이야기들을 가르침 삼아 내 것으로 만들고, 가끔은 나 역시 선배님이 얘기해 주시는 어떤 상황의 문제들과 관련해서는 내부의 직장동료가 아닌 한 발 뒤쪽에서 상황을 볼 수 있는 조금은 객관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으니, 충분히 상호 긍정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한때, 하고 싶은 것만 하기에도 부족한 이 시간에, 굳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시간을 갖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랴~ 하는 신념에 주변 인간관계를 좀 둘러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얍삽하게도 나는, 혼자만의 기준으로 주변 사람들을 필터링하여 채에 건져내는 작업을 하면서도, 내 감정보다는 미래에 어떠한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을 위주로 마음속에 걸러내었던 것 같다. 그런 인간관계 정리쯤은 그냥 시원하게 용서하자. 한 개인의 기준으로, 한 개인이 혼자 꾸민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 물적 피해를 주지는 않았으니.. 스릴러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뭔가 끔찍한 생각을 현실에서 실행해 보이는 인간들도 있는데 뭐.. 이 정도면 애교 아닌가?
들깻가루의 달콤함과 감자를 갈아서 찐듯한 푹푹한 소스 같은 것에 칠면조 다리라고 해도 믿을 닭다리가 파묻혀 있던 이름 모를 음식과 구수한 버섯 누룽지탕, 그리고 매콤한 쫄면이 있는 한상 세트를 깔끔하게 비우며, 막걸리 한잔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코로나19로 인해 좝(JOB)이 피폐해진 얘기를 드려서 인지, 식후 담배를 태우는 자리에서, 다음 골프모임에 대한 라운딩 비용을 시원하게 쏘신다고 한다.. 아니라고~ 괜찮다고~ 몇 번 연기대상급 열연을 펼치며 마지못한 척 ‘감사합니다~’를 전한다.. 15만 원이라는데.. 라운딩 비용에 밥값에.. 오늘도 난 20만 원을 벌었다..
one for one..
또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
자주 연락을 드리지도 않는 후배다. 감사한 게 참 많고, 배우고 있는 것이 많은데도 언제 한번 시원하게 감사의 표현도 하지 못하는 못난 후배다.
오늘도 선배는 이 못난 후배에게, 가벼운 듯 던지셨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은 위로와 응원을 주셨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늘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툭! 하고 던지실 수 있는 마음의 깊이를 닮고 배우고 싶다. 그리고 늘 감사한다.
여전히 한심한 후배이고, 앞으로도 기대에 부응하는 못난 후배이겠지만, 언제든 어떤 도움이라도 필요하시면 모든 걸 제쳐두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후배가 될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