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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혜 Nov 16. 2023

코펜하겐의 추억 1

4년이 지나서야 꺼내보는 WHO PQ의 기억


얼마 전, 식약처가 WHO 우수규제기관(WLA)에 등재됐다는 기사를 봤다. 의약품과 백신에 대해 임상시험, 시판허가 8개 분야에서 등재됐다는 소식이었다. 그간 PIC/s 가입, ICH 회원국 가입 등 식약처의 국제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이번 WLA 등재도 기존 규제 선진국인 SRA 국가(미국, 일본, 유럽)만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의미있는 성과다. 규제기관이 이만큼 수준높게 관리하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나라 제약회사들의 수출길이 더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출처=식약처 홈페이지

나는 식약처 재직 시절  작업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동료들이 몇 년에 걸쳐 준비하고 직접 실사 받으면서 애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매우 기뻤고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런데 아직 갈 길이 조금 남긴 했다. '의약품 시판허가' 분야다. 이 부분을 보완해야 비로소 모든 분야에서 WLA 등재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WHO가 요구하는 심사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담당 부서에서 본격 고민을 시작할 차례다.




기사를 보며 문득 4년전 기억을 꺼내본다. 2019년 3월부터 나는 덴마크 출장을 네 차례 다녀왔다. 코펜하겐 UN city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열리는 WHO-PQ 심사에 참석하기 위해 코펜하겐에 일주일씩 머물렀다.


WHO-PQ란, 저개발 국가에 필수 의약품, 백신 등을 공급하기 위해 전세계 심사자들이 모여 품질과 생동성을 심사하는 자리다. 의약품의 경우 주로 말라리아 치료제, 피임약, HIV 치료제 같이 치명적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 해당된다. 주로 오리지널 약과 주성분이 같은 제네릭의약품이기에 품질과 생물학적동등성을 심사한.


출처=WHO PQ 홈페이지



육아휴직에서 복직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지만 과장님께서 조심스레 제안하셨고, 휴직 전부터 이 업무를 욕심내고 있었던 나는 냉큼 하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코펜하겐 출장길에 올랐다. WHO 본부는 제네바에 있지만, PQ 심사자들은 UN city 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모인다. 이 곳에서 5일간 다같이 모여 심사를 다.



UN city at Copenhagen



각국에서 온 심사자들은 거칠게 나누두 부류다. '지원해 주는 국가' 심사자와, '지원받는' 국가의 규제기관 심사자다. 미국 FDA, 스위스 swiss medic, 브라질 ANVISA, 캐나다 Health Canada, 호주 TGA처럼 이미 국제적인 영향력이 큰 규제기관에서 온 심사자들이다. 반면 짐바브웨, 케냐,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등 의약품을 공급받는 국가에서도 심사자들이 온다. 자국민에게 공급되는 에 대한 심사 권한이 있는 거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 MFDS는?전자다. WHO를 통한 의약품 공급에 우리나라 제약사들이 의향서를 많이 냈다. 그리고 이미 ICH 회원국인 우리나라 식약처 심사 역량에 대해 WHO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바다와 맞닿아 있어 어디서든 경치가 아주 좋은 UN city


다만 심사자 개인으로서 내가 보여준 심사 이력이 없는 게 문제였다. 참석 의향을 밝히면서 추천서와 이력이 적힌 CV를 보내긴 했지만, 이들은 아직 내 검토 수준을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베테랑 소리를 들었더라도, 여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내가 처음 배정받은 것은 이미 수 차례 앞선 검토를 거친 후, '안정성' 자료 검토만 남은 서류였다. 안정성 자료 검토는 우리 심사 부서에서도 경력이 짧은 심사자에게 배정되고 있었다. 양이 많지 않은 서류를 보면서, '여기서도 똑같이 배정하는구나' 싶어 속으로 웃음이 났다.


의약품 사용기간이 36개월이면 이를 입증하는 안정성 시험 자료는 그만큼 시간이 걸려야 준비된다. 꼭 36개월까지 시험할 필요는 없다. 그 나라의 일상적인 기후를 반영한 보관조건으로 시험한 '장기보존' 시험 자료와, 보관조건을 좀더 가혹하게 해서 만든 '가속시험' 자료를 가지고 경시변화 추이를 봐서 사용기간을 입증할 수도 있다. 어쨌든 안정성시험 자료는 품질자료 중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되는 자료 중 하나다.



UN city 내부


자료를 받아든 나는 자료 내용을 5분 안에 파악했다. 안정성 시험 시점마다 결과에 별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결론은 '적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검토서 작성이었다. 식약처의 한글문서 검토서 양식은 익숙했지만 여기는 검토서 양식이 달랐다. WHO 양식에는 이전 심사자가 보완 요청한 사항, 업체가 제출한 자료, 그리고 내가 검토한 의견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써야 했다. 그것도 영어로. 가벼운 대화 정도 이어 가는 수준의 내 영어로는 단어마다 다른 뉘앙스를 구분하기가 영 어려웠다. 왜 이 자료 '적합'으로 판단했는지 구구절절 써야 는데,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검증해 가며 써야 했기에 검토 의견 한 줄 쓰는데 무척 오래 걸렸다.


가장 좋은 레퍼런스는 비슷한 사례 검토서였다. 검토서 몇 개를 찾아다 펼쳐 놓고, 이런 의미를 이렇게 쓰는구나 익혀가며 내 검토서에 필요한 표현을 찾아 넣었다. 그러다 보니 장장 5일에 걸친 심사기간 동안 안정성 검토 겨우 몇 건 한 게 고작이었다. 한국이었으면 하루도 안 걸렸을 검토  분량을 5일에 걸쳐서 한 거였다.



심사장 바깥으로 크루즈 유람선이 하루에 몇 번씩 지나갔다.



간단한 자료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참석 횟수를 거듭하면서, 나는 안정성 자료 검토 뿐 아니라 다른 내용이 들어 있는 품질 심사도 배정받았다. 역시 간단한 자료였지만, 검토서 양식이 다르 같은 자료도 다른 방식으로 검토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늘 쓰던 한글 검토서 양식이 아닌, 낯선 워드 양식에 영어로 검토 의견을 작성하는 것은 마치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처럼 낯설고 새로웠다.


내가 작성한 검토서는 다시 2차 심사자의 검토를 받는다. 내가 검토한 내용 그대로 또다시 2차 검토자가 낱낱이 살핀다. WHO 소속인 2차 검토자는 내가 쓴 검토서를 파란색 글씨로 첨삭을 해 준다. 검토 방향이 바뀌어야 할 때는 나를 불러다가 의견을 묻기도 한다. 첨삭받은 내용을 보며, 다시 한 번 WHO의 검토 방향에 대해 알게 됐다. 어떤 때는 간단한 영문법을 첨삭받은 적도 있어 혼자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2편에 계속)



퇴근하고 나서는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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