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지혜 Nov 04. 2023

안전지대 벗어나기

회사 구내 식당에서 혼밥하며 든 생각

<2023년 여름, 이직을 본격 결심하고 쓴 글>



관내 출장을 갔다가 점심시간에 혼자 구내식당에 간 적이 있다. 가끔 이용하는 오송보건의료행정타운 구내 식당이었다. 비가 온 탓인지 식당 안은 직원들로 북적북적했다. 삼삼오오 모여 식사하러 온 직원들 사이에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괜찮을까?' 나는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대뜸 줄을 섰다.


'혼밥 레벨'이 한때 인터넷 유머로 돈 적이 있다. 혼자 식사를 해결해야 할 때, 어디서 먹는 게 가장 어색할지로 나눈 레벨이다. 이 표에서 구내식당은 '혼밥레벨 2'다.


출처=알바천국


하지만 내게는 회사 구내식당이 '혼밥레벨 9'다. 왜냐하면 '나를 잘 알거나, 애매하게 알 수도 있는' 회사 동료들이 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 식당이면 오히려 혼밥하기 편하다. 그러나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밥 먹는 곳에서 혼자 식판을 앞에 두고 밥 먹는 건 내게 은근히 신경 쓰이는 일이다. '왕따로 보일지 모른다'는 괜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날 배가 무척 고팠고, 끼니를 빵이나 라면으로 때우기는 싫었다. 갓 지은 밥과 반찬 세 가지, 그리고 짭짤한 국으로 든든히 속을 채우고 싶었다. 옆 부서 김 주무관이 내가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본들 신경이나 쓸까? 나 역시 누가 밥짝이랑 같이 왔는지 신경 쓰지 않으니 말이다.


결국 줄을 서서 식판 가득 밥을 떠서 TV 앞에 자리잡았다. TV 뉴스를 벗삼아 식사에 집중했다. 뒤에서 아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오로지 식판 위의 식사에만 집중했다. 밥풀 하나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식사를 마무리하니 속이 든든했다. 함께 온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고 식사에만 집중하니 편했다. 그래, 이게 혼밥의 매력이지. 막상 해보니 구내식당에서도 혼밥 할 만 했다. 가장 붐비는 시간에도 말이다.


식약처, 질병관리본부 등 직원들이 이용하는 구내식당(출처=오송생명과학단지지원센터 홈페이지)


직장 동료들이 많은 곳에서 혼밥을 하고 있자니 문득 2012년 초가 떠올랐다. 벌써 10여 년 전, 경인지방식약청에서 근무한 지 만 3년이 지났을 때였다. 업무는 익숙했고 동료들과는 가족 같았다. 집에서 가까워 출퇴근도 쉬웠다. 하지만 그 시점이 되자 나는 거기 계속 있을 수만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한 번은 본부가 있는 오송에 와서 심사 업무를 해봐야만 내가 더 성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정기인사 시즌이 왔기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익숙한 업무 환경과 지역에서 벗어나겠다는 도전을 위해서였다. 인사 시즌에 원하는 이동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었지만 나는 운 좋게 기회가 닿아 의약품심사부로 발령받을 수 있었다.


용기내어 왔지내게 오송은 매우 낯선 세계였다. 충청북도 지역도 낯설고 처음 만나는 본부 동료들도 낯설고 무서웠다. 당시 경인지방청은 서로 연결된 작은 건물 두 개로만 운영될만큼 단촐했고 직원 수도 적었지만, 본부는 훨씬 거대했다. 행정동, 연구심사동, 평가원동 등 건물도 많고 부지도 넓은 데다 직원 수도 훨씬 많았다. 처차장님이 계시는 곳이라 분위기도 더 공식적이고 엄숙했다.


그 곳에 처음 출퇴근하던 시절에는 마치 사바나 초원에 처음 데뷔한 집토끼가 된 심정이었다. 출퇴근 KTX 기차 안에서 누군가를 마주치는것도 두려울만큼 어렵고 낯설었다. 출퇴근길과 업무공간, 그리고 이 드넓은 오송보건의료행정타운이 내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10여년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동안, 이 곳에서 나의 안전지대는 점점 넓어져 갔다.


불편하던 심사부 복도가, 연구심사동 전체가, 행정동과 평가원동이 점점 익숙해져 갔다. 시간이 지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면서부터는 캠퍼스 한쪽에 자리한 청사 어린이집도 매일 드나들었다. 아이 친구 엄마들도 알게 되었고, 익숙함의 반경은 한결 더 넓어졌다. 다른 사람들을 특별히 신경쓰지 않게 되었고 행동이 자연스러워졌다. 나를 감싸고 있는 지금 이 공간이 매우 편안해졌다.


공간적인 안전지대 뿐 아니라, 업무적인 안전지대도 넓어졌다. 의약품 품질 심사 업무가 점점 익숙해졌다. 심사 경력이 쌓이니 누구와도 업무와 관련한 디스커션을 하기가 어렵지 않게 되었다. 연차가 쌓일수록 업무 경험이 많아져서 내 스스로 자신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업무와 관련한 내 의견에 조금씩 무게가 실리게 됐다. 다른 심사자에게 업무 경험과 의견을 나눠줄 수도 있는 심사자가 되었고, 어느 순간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아졌다. 오래 하다 보니 가끔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나는 제네릭의약품과 개량신약 품질 심사를 오래 했다. 그 결과 국내 제약회사들에 대한 (혼자만의)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고, 내가 조금이나마 의약품 허가받는데 기여했으 앞으로  더 잘 됐으면 하는 은근한 내적 응원도 하게 됐다. '아는 만큼 사랑한다'는 최재천 교수님의 말은 정말이었다. 물론 의약품 심사란 케이스가 모두 달라 어렵고, 알아야 할 가이드라인과 규정이 방대하기 때문에 '진짜 고수'가 되려면 갈 길이  것은 맞다. 하지만 이제는 뒤도 조금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 능선에 오른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2012년 초에 오송행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느낌이었다.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제 '혼밥 레벨 9'까지 정복하게 된 이 곳은 이제 나의 안전지대가 되었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이대로 여기서 정년을 채우며 20여 년을 더 보내는 게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물음에 나는 선뜻 "Yes"라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공무원 조직에서 성실하게 14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바깥 세계'가 궁금했다. 빠르게 변하는 업계가 궁금했고, '약사' 타이틀을 활용해 일해 보고 싶기도 했다. 박사학위도 힘들게 땄는데, 이걸 조금 활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마치 학업 성적이 완벽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학교를 졸업하듯이, 나도 뭔가 마침표를 찍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스테이지를 바꿔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더 늦으면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내가 변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조직에서 나를 흔쾌히 받아주는 것도 '때'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만 이 '안전지대'를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어딘가에서 본 유명한 문장이 떠올랐다.


Nothing great ever happens in your comfort zone.
안전 지대에서는 멋진 일이 일어나지 않아.


안전지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익숙한 이 곳. 나는 이제 이 곳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부딪치고 깨지고 실망하고, 그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어 가며 영역을 넓혀야 할 때가 온 거였다. 구내식당에서 혼밥을 해도 아무렇지 않고, 캠퍼스 어딘가에서 흐느적흐느적 걷다 누굴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가 됐으니, 이만하면 졸업할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또다른 '사바나 초원'을 찾아 나서야겠다. 때가 됐으니 정들었던 이 곳에 작별을 고해야겠다.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헤맨 만큼 내 땅'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 같다. 헤매고 부딪치는 경험 자체는 달콤하지 않지만, 되돌아봤을 때 나를 견고하게 지탱해 줄 경험이 된다는 것을 10여년 전 오송행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또 다시 낯설어하고 어려워하는 '뉴비'가 되어 나만의 새로운 안전지대를 만들어야겠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고군분투할 것이다. 내 인생의 'Something Great'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조금 격한 나의 모닝 리추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