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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혜 Jun 24. 2023

나는 가끔 너에게 진상을 부린다

그리고 너는 의젓하게 나를 달랜다

분양받은 아파트 사전점검 날이다. 몇 주 전부터 연차를 내 두었던 나는 아침부터 셀프 점검에 필요한 도구를 챙겼다. 중요한 점검 도구 중 하나는 천장을 확인할 수 있도록 딛고 올라설 수 있는 '간이의자'다.


접이식 간의의자 (사진출처 = 11번가)



간의의자 다리가 삐죽 튀어나온 쇼핑백을 들고 아이 손을 잡고 길을 나선다. 학교 데려다 주고 바로 출발해야지.


한 손에 쇼핑백, 한 손에 아이 손을 잡고 학교를 향해 타박타박 걷는데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다.


"서윤아, 이거 뭐게?"

"의자?"

"응. 엄마가 오늘 의자 왜 갖고 나왔게?"

"왜?"

"서윤이 교실에 엄마 자리가 없잖아. 엄마 오늘부터 이 의자 펴고 앉아서 서윤이 옆에서 수업 듣고, 급식실에도 들고 가서 서윤이 옆에서 밥도 먹으려고."

"??? 왜? 엄마 회사 안 가??"

"엄마가 요즘 회사다니기 너무 힘든데, 엄마가 일을 잘 못해서 힘든 것 같아서. 학교를 다시 다니면서 배워야 될 것 같아서. "

"!!? 아니, 엄마! 1학년부터 배워서 뭐 하게! 엄마 대학원도 졸업했다며!"

"그래도 잘 몰라. 서윤이 옆에서 학교 수업 들을 거야."

"학교는 어린이들이 다니는 곳이라고! 엄마는 가면  안 돼!"


아이는 몹시 곤란해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엄마지만 교실에 아이들과 같이 앉아서 배우고 같이 급식을 먹는 건 싫다. 부끄럽다. 그런데 엄마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는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윤아 엄마도 같이 학교 다니진짜 안돼?"

"(단호하게) 응, 엄마. 안 돼. 우리 여섯 시간 후면 다시 볼 거잖아. 얼른 회사로 가."

"그럼 엄마가 학교 건물 앞까지만 가면 안 될까?"

"...알았어, 엄마. 근데 진짜 교실 들어오는 건 안 돼, 알았지?"


(잠시 후 학교 건물 앞)


"엄마 건물 앞에서만이라도 의자 펴고 앉아있으면 안 될까?"

"(단호하게)  된다고!!"

"알겠어..."

"엄마, 얼른 가. 알았지? 사랑해! (손 흔들며 멀어진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얼른 가!"


진상은 여기까지. 나는 속으로 혼자 쿡쿡 웃으며 돌아선다. 엄마가 들어서기를 원치 않는 아이만의 영역을 확인한 셈이다. 교실까지 따라 겠다며 생떼부리는 엄마를 단호하고 부드럽게 달래는 모습이 새삼 의젓해 보인다.


아이가 만약 '그래 엄마, 나랑 같이 가. 학교에서도 엄마랑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나는 다른 고민을 시작했겠지. 하지만 그런 기색 없이 씩씩하게 자신만의 사회로 혼자 들어갔고, 그런 아이 모습을 나는 보고 싶었던 거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4년 전, 육아휴직 복직 전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 떠오른다. 아이는 교실에 안 들어가겠가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4살짜리였다. 아이를 안아 들고서 교실에 갖다 넣고 기어이 도망치듯 돌아서던 그 때. 나는 만 36개월까지 지겹도록(?) 끼고 키워 놨기에 애착 형성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린이집 등원은 아이에게도 당황스러운 변화였던 게다.

 

그래도 몇 주에 걸쳐 아이는 결국 잘 적응했다. 내 회사와 가까운 직장 어린이집을 일곱 살까지 잘 다니고 졸업했다. 돌이켜보면 애착 형성이 잘 되었기에 이후 분리도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여덟 살이 된 지금은 그 애착이 더 단단히 여물어 그 경계도 한결 선명해졌음을 느낀다. 집에서는 끝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거리낌없이 몸을 부비지만, 대문 밖을 나서면 아이는 엄마와의 이 '사적인 관계'에 칼같이 선을 긋는다. 자기만의 사회적 자아가 있는 거다. 그런데  '사회인의 영역'에 갑자기 엄마가 쳐들어와 간이 의자를 펴고 자리를 차지하겠다니 아연할 밖에.


애착 형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공적인 분리"랬다.  그래서 적어도 생후 36개월은 끼고 키우며 끝없는 애정을 확인시켜 줘야 아이가 부모와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고 한다. 그래야만 때가 왔을 때 의젓하게 부모를 떠나간다고. 나는 그릇이 크지 않은 인간이기에 아이에게 무한한 애정을 매 순간 보여주지는 못했을지언정 36개월간 끼고 키우는 것만은 어찌어찌 했다. 육아는 다 어렵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36개월 퀘스트'를 나는 결국 해냈다는 약간의 자부심도 있다. 그래서 아이가 세상 속에서 단단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긴 육아휴직 기간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싶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때때로 아이가 사회적으로도 꽤 자랐음을 보여주는 모습 - 부모를 찾지 않고 또래들과 여러 시간 놀 때, 학원이나 학교 문을 의젓하게 들어설 때, 가족 아닌 다른 어른들과 어렵지 않게 의사소통 할 때 등등 - 을 본다. 그러면 나 말고도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는 아이 모습에 혼자 괜히 눈꼽처럼 들러붙은 애착의 잔재를 느끼곤 하는 것이다. 끈끈한 애착을 만들고자 애쓴 끝에 분리되어야 할 시기가 다가왔지만, 나는 막상 깔끔히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뭐, 그게 어디 그렇게 무 자르듯이 되나. 아이에게도 부모라는 커다란 껍데기를 벗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릴 테지. 이 '껍데기 벗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나는, 한동안 이런 가벼운(?) 진상을 종종 부릴 것 같다. 아이가 크는 동안 부모도 함께 큰다. 나는 아직 '엄마 나이 8세'니까, 아직은 어린아이 같은 어리광 좀 부려도 되지 않을까. ('엄마 나이 30세'가 되어서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으니 말이다)


어리광부리는 나를 달래는 아이의젓한 모습이, 나를 힘있게 안아 주는  품이 말랑말랑하면서도 믿음직하다. 퇴근 후, 세파에 잔뜩 찌들어온(?) 나에게 그 말랑한 따뜻함이 한없는 위안을 주기도 한다. 부모는 아이의 우주라고들 하는데, 나 역시 커 가는 너에게서 점점 넓어지는 나의 우주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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