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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23. 2022

많이 늙은 스물다섯

꽤 오래전 함께 했던 기억으로,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어제 오후, 움직이다 보니 부재중 전화가 3통이 있었습니다. 모르는 번호였습니다. 그래서 한 차례 전화를 걸었습니다. 안 받더군요. 그러고 나서 한 시간여 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다시 그 번호가 폰 화면에서 환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통화한 아이. 아니, 어른. 올해 스물다섯, 군은 면제. 저를 잘 따르던 그 아이가 교사가 되었답니다. 올해, 첫 임용에서 합격했다고. 말투는 여전했습니다. 고1 때부터 다소 애늙은이 같은 말투였지요. 하지만,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성실했고, 전체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특정 과목을 잘했던, 그래서 본인 스스로 '지방대나' 가야겠다고 했던, 그 아이가 지방대 사범대를 거쳐 편입을 통해 다시 일어섰더군요. 같은 일을 하게 되어, 담임 업무를 맡게 되어, 내가 생각했다면서 너스레를 떠는 녀석과 통화를 마치고는 그때 그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들과의 기억을, 추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아무런 일정도 없는 금요일 오후는 보통 담임 임장 시간이다. 올해 우리 반은 금요일 4교시부터 오후 내내 내가 교실에 들어간다. 4교시는 창체 진로, 5~7교시는 이런저런 창체 활동 – 의무적으로 해야 할 교육들이 많기도 하다. -으로 세팅되어 있다. 가운데 6교시에 부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게 보통이다. 숨 한번 쉬었다가 다시 7교시에 들어간다. 이런 스케줄이 보통 한 달에 두 주 정도가 그렇게 운영된다. 잘 활용하면 나도 아이들도 꽤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쉽지 않다. 이런저런 교과별, 교사별 활동으로 빈자리가 생기는 게 보통이다. 여기에 아이들도 나도 불타는 금요일, 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른 쉬고 싶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주 오늘, 금요일 4교시 창의적 체험활동 중 진로활동(시간표에는 ‘창진’으로 표기되어 있다)에는 아이들에게 독서를 시키고 있다. 맞다. 시키고 있다. 아이들은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읽기에 매우 익숙하지 못하다. 그나마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제한적 읽기는 집중하지만 – 물론 그마저도 읽지 않는, 읽어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 글밥이 많은, 별로 심오하지 않은 글도 좀처럼 읽지 않는다. 그래서 학기초부터 ‘이 시간은 자기가 고른 책’을 읽는 시간이라고 엄포를 놓고 운영 중이다. 책을 준비 못하고, 안 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물함 위에 몇십 권의 학급 문고를 만들어 놨다. 우리 반 아이들이 개별적으로 신청한 책을 학교에서 사주고, 내가 집에서 가져다 놓은 책들이다. 아이들이 시험, 수행평가에 쫓겨 못 읽는 책을 일주일에 한 시간, 이 시간만 큼만이라도 읽으라고 재촉한다. 나름대로 가장 엄격하게 운영하려고 하는 시간이다. 물론 4교시여서 종 치기 10분 전부터는 꼬물꼬물 속닥거리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스물 한명중 열서너 명이 읽는다. 여기에는 운동선수 2명도 포함되어 있다. 중간중간에 독서일지를 제출하는 아이들이 그 정도이다. 


  5교시에 들어갔더니 스물한 명인 우리 반 아이들 중 절반 정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방과 후에 꾸준히 학교에 남아서 열심히 공부하는 연수, 연수와 가장 절친이면서도 칼 하교를 하는 학원파 희야는 수학과에서 주최하는 수학체험 교실을 신청해서 거기에 참여했다. 방과 후에 자기 주도 학습실에서 공부하는 민규와 은지는 고려대 탐방을 위해 일찍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분리수거를 완벽하게 하는 성민이는 학생자치법정 멤버여서 준비 모임에 갔다. 우리 반에서 가장 키가 큰 성민이는 화분 만들기 활동에 참여하러 나갔다. 성민이는 긍정적이고 밝다. 영어를 제외하고는 성적은 우수하지 않지만, 매사에 책임감 있게 열심히 한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애매하게 착한 것들은 결정적일 데 말이 없지만 – 나도 그런 축에 속하지만 – 성민이는 서글서글하게 학급일을 잘해준다. 형광등도 갈고, 복도 벽에 축 처져 있는 게시물도 스스로 붙여 놓는다. 


  태권소녀 연희는 오늘 중학교에 태권도 시범을 하러 갔다. 연희는 전국대회 우승한 경력이 있다. 요즘은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걱정이다. 1학기 때부터 직업교육(위탁)을 가겠다며, 학교에 늦지 않고 일찍 오지만, 수업과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종이는 언제부터 엎드려 자고 있는지 잠에 취해 있었다. 규태와 만우는 편부, 편모 가정의 아이들이다. 둘은 절친이다. 서로를 학기초부터 알아본 거다. 규태는 그냥 학교 시스템에 자기를 못 맞추는, 말 많고 축구 좋아하고, 늘 여자 친구를 사귀려 애쓰는, 그러면서도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기간 제한적 듬직함이 뒤섞여 있는, 직업군인이 꿈인 아이다. 반면 만우는 1월 방학중 강전을 온 학폭 가해자이다. 덕분에 우리 학교 교사나 친구들 사이에 만우에 대한 쓸만한 정보(?)가 없다. 


  3월 제주도 수학여행 때, 4월 수업 중에 다른 반 학생, 특정 교과 선생님과 정면충돌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우는 항상 문자와 통화를 주고받으며,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애쓰면서 강한 척하는, 작은 트럭을 운전하는 아빠가 계신다. 그 아빠는 다행히, 나와는 한 편이다. 이 두 아이들은 일주일에 절반 정도 지각을 하고 - 자기네 끼리 ‘정 등’ 하지 못한다고 하던가 – 가끔 결석을 한다. 수업시간에는 거의 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1학기 내내 오늘 같은 금요일 오후는 두 아이와 번갈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팩트를 확인하고, 다짐을 하고, 각오를 다지다 보면 7교시가 다 끝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는 동안 전혀 생각이 없던 아이들과 부모님을 설득했다. 직업교육(위탁)을 가자고. 지난주에는 현체를 내고 위탁 갈 기관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이후 2주 동안 규태와 만우는 눈빛이 많이 진지해졌다. 아직 행동은 투박하고, 수업시간에는 엎드려 있지만. 


  오늘 5교시. 규태와 만우가 종이를 펼쳐놓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것도 5교시부터 6교시까지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둘이 들썩거리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원래 둘이 대화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목소리가 두배는 크다. 자주 지적을 하지만, 악의 없이 원래 그렇다. 소곤 거리 지를 못한다. 특히 규태가. 자기 방을 다시 설계해서 서로 자기가 더 잘했다며 아웅 거리고 있었다. 두 아이는 며칠 전에 건축설계 분야에 위탁을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규태와 만우는 벌써 마음이 고3이다. 규태는 고3 때 건축설계 관련 자격증을 6개 따겠다고 호언장담한다. 만우는 장학금을 받으면 치킨을 사달란다. 


  6교시 부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나는 교무실에서 아이들 생기부를 입력했다. 7교시 담임 시간. 다시 들어와 보니, 5교시에 나가 있던 아이들 중 민규, 은지, 연희 그리고 축구부 두 학생을 빼고 모두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성민이는 책상 위에 커다란 스투키 화분을 올려다 놓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원예치료프로그램에 참여한 결과물이다. 치료가 필요한 아이가 아니라 원래 대상인 친구 대신 신청을 해서 기회를 얻었단다. 스투키가 제법 굵직하다. 연수는 평소 말이 없다. 하지만 물어보는 말에는 친절하게 정성껏 대답을 하는, 약간 시크한 스타일이다. 방과 후 거의 남아서 스스로 공부를 한다. 성적은 중상. 연수가 먼저 말을 건다. 올해 몇 번 되지 않는 기회(?)이다. 수학체험전이 스틱으로 다리를 만드는 거였단다. 무너지기를 여러 번, 인내심 테스트였다며, 너스레를 진지하게 떤다. 


  반면 우리 반 봉사시간 대장 희야는 별 말이 없다. 그 옆에 있던 수진이가 나무 스틱을 모아 들었다. 수진이는 그 나무 스틱을 가지고 칠판 앞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만들어 보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나는 맨 앞에 앉아 있던 미영, 서진이와 이야기를 나눈다. 미영이는 2학기 학급회장이다. 성취욕이 있는 학급 임원은 아니다. 그저 자기 능력껏 봉사하는, 착한 학생이다. 서진이는 우리 동아리장이다. 의욕이 많다.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덤비면서 가끔 마상을 입고, 그래도 꾸역꾸역 잘 헤쳐나가는 리더형 아이다. 두 아이와 사랑에 대해 토론(?)을 했다. 10대의 사랑. 미영이는 예쁘게 잘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다. 미영이와 서진이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그때 수진이가 나를 부른다. 일어나 가보니 칠판 밑 교실바닥에 나무 스틱 다리를 봉 그렇게 만들어 놨다. 성공했다며 자랑이다. 옆에 있던 연수와 희야가 박수를 친다. 늘 말이 없이 엷은 미소로 이 무리에 항상 끼어 있는 윤주도. 탄력이 있는 나무 스틱이라 구부러졌다가도 다시 원상태가 되어야 한다며, 내가 살짝 밟고 지나갔다. 그러자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수진이는 나를 타박한다. 연수는 수진이를 타박한다. 원래 되살아나야 한다고. 수진이는 징징거리면서도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만들기 시작한다. 


  수진이는 2학기 들어 병원에 다니고 있다. 우울증이 조금 심한 편이다. 5남매의 막내인데, 자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없단다. 가장 큰 오빠는 서른. 바로 위 언니도 스물셋이다. 엄마는 외국인이다. 아빠는 예순 후반이다. 본인 스스로 학교 밖 상담을 여름방학 때부터 신청해서 듣고 있다는 사실을 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엄마가 학교에 한번 오시도록 유도했고 그때 외부에 있는 모 소아정신과에 가보도록 권유했다. 다행히 수진이도 엄마도 받아들이셨고, 지금 두 달째 약을 복용 중이다. 얼마 전에는 아빠까지 상담에 참여하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최근에는 가라앉은 날이 더 많지만 오늘은 친구들과 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잘 논다. 핼쑥해진 표정이 오늘은 열여덟 같다. 


  수진이의 스틱 다리를 지나가는데, 규태가 만우랑 시끌벅적하다. 중간중간에 육두문자가 뒤섞여 건너 다닌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 내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가로로 가져다 세운다. 그러면 잠시 조용해진다. 그래서 고맙다. 규태한테 다가갔더니 팔뚝을 걷어서 보여준다. 만우가 유성펜으로 규태 팔에다 생선 비늘 같은 그림을 그려놨단다. 문신이란다. 간지 난단다. 그 밑에는 사랑해~라고 써져 있다. 그 뒤에서 두 아이를 서진이가 내려다본다. 서진이는 학생회다. 아빠가 안 계신다. 중학교 학생회장 출신이다. 이벤트를 만들고, 회의를 진행하고, 의견을 모으는 일에 공부보다 더 열성이다. 성적은 중간 정도. 규태와 만우는 서진이가 바른 길로 인도하면 잘 따라 주는 친구 사이이다. 수행평가 준비하라고, 모둠 활동하라고, 지각하지 말라고,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지적하면서 제 목소리가 우리 반에서 가장 크다는 건 인식하지 못하는, 잘 삐치고 금방 풀리는 울보다. 감성이 풍부한 쪽보다는 어려서 그런 편이다. 그런 서진이가 규태와 만우를 타박한다. 그런 그림을 좋아한다니, 간지 난다니, 정신이 나갔다고. 규태와 만우는 장난이지~ 하면서 너스레를 떤다. 


  오늘 오후는 아이들 사이에서 살았다. 한 반이지만, 다 다른 무리. 그 무리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살았다. 그 사이에 다리를 놓고 돌아다녔다. 오늘도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아이들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나눈다. 오늘도 아이들 사이에서 살아, 행복하다.




 희야 친구였던 열일곱의 학생에서 스물 다섯의 선생으로, 제자에서 동료로, 후배가 된 그 아이. 나이가 너무 늙었다면서 - 나이듦의 기쁨을 아직은 잘 모르는 나이여서 그런가 봅니다. 대뜸 늙음으로 표현하는 게 - 이제 교사 두 달 살이를 해놓고 전화기 너머로 너스레를 떤 참 많은 말 중에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데, 해야 하는 것들이 90퍼센트가 넘는 것 같아요'라는 말이 귀에 걸립니다. 그 10퍼센트를 몇 년 동안 돈 들여, 시간 들여 배우고, 그다음은 멋지고 훌륭한 선생이, 아니 사람이 되라고 하는, 현재의 구조를 벌써 두어 달 만에 느끼고 있더군요. 역시 요즘 이십 대들 같다 싶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90퍼센트를 만들면서, 채우면서, 지금보다 더 익은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네요. 직장과 직업의 간극을 혼자 공부하고, 혼자 시험 잘 보는 것으로만 메울 수 없다는 사실을 빨리, 건전하게 느끼면서 어른이 되어 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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