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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l 15. 2023

내 인생은 비밀번호

다음 주면 3년간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드님을 만나러 갑니다. 다시 한번 태평양을 건너서, 아니 날아서. 그래서 지난 일주일 동안 티켓팅, eTA, ESTA 발급, 숙소 예약, 여행자 보험 가입, 로밍 접수, 렌트 접수, 신용카드 발급, 재발급 등 굵직한 것들은 다 컨펌하였습니다. 입원하고 계시는 어머님한테 왔다 갔다 하면서, 학기말 성적 처리 와중에도, 학기말 자율과정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학급 스물아홉 아이들의 한 학기 학교생활에 대한 기록을 시작하면서, 매을 글을 쓰면서. 극한 호우 속에서.


자그마한 휴대폰 속에서 웹으로 다 해낼 수 있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상황 속에서 휴대폰으로 집중해서 들여다볼 시간이 녹녹하지는 않지요. 그러다 드디어 어제 금요일. 어머님이 수술 열흘 만에 퇴원을 하셨습니다. 조직 검사를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수술도 열흘간 사정도 좋은 상황이라 가능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어머님을 열흘 만에 처남네에서 뵐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참 멘탈갑이십니다. 오히려 젊은 우리를 걱정하시니.    


비속에서 돌아오다 재래시장에 들러 아내는 참기름을 세병 샀습니다. 기름을 살 때마다 들르는 시장 속 형*참기름집이 있습니다. 이 집과 우리 집의 공통점이 하나 있어서 아내는 더 자주 가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드님들이 다 태평양 건너에서 공부 중, 취업 중이라는 점. 작년인가, 서로 그 사실을 아는 사이가 되었네요. 그 사장님도 아내도 아드님들 이야기를 하면서 순간, 동시에 울컥하며 눈가에 이슬비가 내렸었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짐짓 모른 척 고개를 돌려 같은 위기를 모면했었네요. 


그 옆집에서 산 따뜻한 찰옥수수를 하나 베어 물면서 집 근처 다있소에 도착한 게 8시. 한 시간 조금 넘는 동안 처형이 보내온 리스트, 아드님이 부탁한 리스트의 물품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습니다. 처형 리스트에는 아드님이 3년 동안 세컨더리를 다닐 때 이런저런 도움을 준 즈마야네, 혜민네를 위한 물품도 포함되어 있다고 아내가 그러더군요. 여하튼 다있소에서 이십여 초 가까이 출력되는 기다란 영수증을 환불 대기 손님과 우리 셋은 같이 쳐다봐야 했습니다. 그 대기 손님한테 미안했습니다. 총 21만 6천 원. 다털했네요. 다털. 그런데 아내말로는 아직 40만원 가까이 더 구입해야 한다네요. 허, 캐리어로 안 되는 거 아닌지ㅜ 


그런데 진짜 시작은 집으로 돌아와 바닥에 리스트가 물건화 된 후였습니다. 늦은 저녁 옥수수 하나로 배를 채운 상태에, 습한 상태에, 더운 상태에. 3년 전 넣어 둔 캐리어 6개를 발코니 창고속에서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씩, 하나씩 비밀번호를 풀어서 캐리어 크기별로 이 집 짐, 저 집 짐, 나와 따님 짐 뭐 이렇게 나누려고 시작했습니다, 만. 첫 번째 캐리어에서부터 막혔습니다. 세 자리의 캐리어 비밀번호 때문이지요. 어제저녁 9시 30분 무렵부터 어제 톡방에서 많은 작가님들의 조언과 응원(!)에 힘입어 넣어 본 숫자들입니다. 


                      040402062622061617042422093937837371081811101019209020029

  

그러는 동안 결국 마음의 안정과 허기를 달래려고 맥주를 한 캔 따버렸네요. 그러다 두 캔이 되었네요. 하지만 그 사이에도 아내는 쉬지 않고 도전하고 또 도전했습니다. 원래 이런 모습이 내 모습인데, 허릿병 이후에는 그 도전력이 약화된 게 분명합니다. 맥주 마지막 잔이 절반 정도 남았을 무렵, 단톡은 이미 조용해졌을 무렵, 10시 56분. 결국 아내가 괴성을 질렀습니다. 아, 아, 아~~~~ 됐어! 찾았어!  마무리는 결국 우리 집에서 아드님과 함께 이과스럽다고 주장하는 아내가 해결한 겁니다. 어제 톡방에서 다양한 숫자들과 해결 방안으로 제시해 주신 님들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는 동안, 맥주 두 캔을 마시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우리 삶이 어찌 보면 죄다 숫자로 구성된 거구나 하고. 저 위에 나열된 숫자들이 읽히지 않으시지요? 그런데 우리 가족은 구분되어 죄다 읽힙니다. 태어나면서 숫자를 부여받네요.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하고. 생을 마감할 때도 마찬가지죠. 그 사이 언제 누구를 만나고, 얼마동안 만나고, 어떻게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시험을 보고, 직장을 얻고, 다시 잃고, 또 얻고. 그 사이 내 몸무게도, 키도 줄었다, 늘었다 하고. 나이도 늘고. 빚도 생기고, 갚고. 또 그러는 사이 가족도 늘어나고. 기념일도 늘어나고. 


그렇게 비밀번호 덕에 수십 년을 훅 왔다 갔다 했네요. 시력도 나보다 더 좋지 않은 아내는 분명 캐리어 비번을 풀면서 함께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미안함을 달래려고 한 걸 겁니다. 운전도, 좁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것도, 영어도 모두 아내에게는 공포에 가까운 짙은 두려움이기 때문이어서 말입니다. 아내의 마음을 내가 대신 전해줄 수 있어 조금은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원래 쉬어야 하는 늦은 시각에 그렇게 캐리어를 부여잡고 있었을 겁니다, 분명. 


비밀번호 덕에, 아내 덕에 그렇게 갑자기 나의 세월이 소환되었습니다. 지금의 아드님보다 더 어렸던 열여섯 겨울. 나는 그렇게 산골에서 내려와 바닷가에 있는 학교로 겁 없이 혼자 떠났습니다. 그때는 그것도 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아침, 오후, 밤으로 삼 교대 출퇴근을 하시느라 얼굴 뵙기 어려웠던 아버지와 새벽 도시락 때문에 초저녁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엄마를 남겨두고. 그렇게 고1 때부터 혼자 살다, 친구랑 살다, 대학에 와서도 다시 혼자 살다, 친구랑 살다. 그렇게 서른셋에 결혼하기 전까지. 줄곧 혼자, 혼자였습니다. 


이제 아드님이 말 설은 낯선 곳에서 그 길을 시작하려고 하는 가 봅니다. 겉으로는 그때의 나보다 더 겁 없어 보이려 합니다. 하지만 아드님 속에 들어찬 결을 잘 압니다. 그때의 나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자그마한 것 하나도 결정하는 게 쉽지 않은, 겉으로만 이과 같은 데 말입니다. 돈, 돈 하면서 말입니다. 이번에 가서 한번 보자 했더니, 제일 먼저 꺼낸 것도 돈이야기였습니다. 비용이 얼만데.... 혼자 다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며칠 지나면서는 가족톡에 이런저런 계획(?)을 넌지시 제시합니다. 


아버지, 예약하신 숙소 주소를 보니까 제가 다니는 헬스장 근처예요. 3주 동안 같이 운동해요. 

아버지, 아버지 오시면 같이 가서 노트북 보고 같이 사요. 

어머니, 이렇게 보낸 리스트는 필수예요. 꼭 가져다주세요. 

어머니, 두통약, 지사제, 감기약, 위장약, 해열제, 소화제, 파스,연고, 밴드, 비타민, 유산균 도 같이요

아버지, 집주인이 이탈리아 사람이래요. 9일 날 같이 보러 가요.


그래서 이렇게 난장을 펼치면서, 빚을 내서라도 태평양을 날아갔으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 갑자기 내가 가봐야겠어라고 했을 때 아내의 표정이었습니다. 말투였습니다. 어, 그럼 나야 고맙지.... 그런데 자기 허리는? 네. 다 준비해 놓고, 이제 환불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 허릿병이 제일 큰 걱정입니다. 1시간을 넘게 앉아 있을 수 없으니. 11시간의 비행기 안에서 어떻게 몸을 풀을까 고민 중입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계속 돌아다녀야지요. 승무원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그러다 운이 좋아 깊게 잠들면 그 시간만큼 비행기는 훨씬 더 빠르게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또 리스트에 있는 품목들을 구하러 출발합니다. 오늘은 모털이랍니다, 모털. 모던하우스 털기. 터는 내내 아내와 따님은 콧노래가 흘러나올겁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덩달아서 안 먹어도 배부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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