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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l 22. 2023

뎁스

Day 4 in Vancouver

방금 한인마트를 다녀왔습니다. 오전에 아드님과 헬스장에 다녀오는 길에 점심 담당인 열여덟 따님이 보낸 톡을 보고. 점심으로 카레를 만든다고 감자, 당근, 양파를 사다 달라네요. 아침은 아빠가 점심은 따님이 저녁은 아드님이 만들고 정리하는 걸로 역할을 나눴습니다. 나 좀 편안하자는 의도가 7할이지만 스스로 먹는 걸 챙겨 먹고 내 주변을 잘 정리할 수 있을 나이라는 걸 알려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흔쾌히(?) 동의한 남매덕에 3주 동안 여유롭게 아드님의 일상에 나와 따님이 잘 녹아들어 갈 수 있겠다 싶습니다.


카레를 좋아하지 않는 아드님도 따님의 카레가 사 먹는 것보다 맛있다며 엄지척을 해줍니다. 설거지 후 음식물 처리에 싱크대 주변 물기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고무장갑과 행주를 잘 걸어두었네요. 그리고는 저쪽 소파에 앉아 새빨간 자두를 우걱우걱 잘도 먹습니다. 참 이쁩니다. 오전에는 10시쯤 아침에 아드님과 헬스를 했습니다. 창고 같은 거대한 건물에 무지하게 많은 기구들이 있는, 인테리어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시크한 공간이었습니다. 여기 도착한 다음날 평소 아드님이 다닌다는 곳이라 따라와 봤는데 고물가에 비해 엄청 저렴한 비용에 함께 하자 했네요. 2주에 3만 천원. 


오늘이 이틀째 운동입니다. 어제는 시차 적응 중이라 잠을 설치는 바람에 그냥 어떤 기구가 있나 정도였고, 오늘은 다양한 기구를 가지고 90분 가까이했네요. 뭐, 웨이트가 다른 이들이 대부분이라 저같이 왜소한 경우에는 가볍게 가볍게 할 수밖에 없는 기구들이 대부분. 언제나 그렇듯이 트레밀에서 먼저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기구 위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얼굴을 들어 앞을 보니 주르륵 있는 거울 속으로 칠십은 분명히 넘었고 아마 80도 되지 싶은 어른 한분이 제 옆 트레드밀에 올려 섰습니다. 거울에서 마주친 눈으로 서로 인사를 하고 각자 운동을 했지요. 


목이 앞으로 숙여지고 허리가 살짝 구부러진 자세로 아주 천천히 천천히 걸었습니다. 가끔 거울에 비치는 모습에서는 이미 팔과 머리, 얼굴에 땀이 흠뻑 흘러내리더군요. 참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느릿하지만 반질거리는 피부가 탄탄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한 십여분 정도 걷다가 멈추었습니다. 딱 자기 운동량인 듯 미련 없이. 그리고는 이내 트레드밀에서 내려 다른 기구로 가나 했습니다. 그런데 옆 손잡이를 보니 그 어른이 가져온 자그마한 가방이 그대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는데 그 사이 거울옆 모퉁이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바로 양손에 하얀 물티슈를 들고 다시 제 옆 트레드밀로 돌아오더군요. 그리고는 손잡이, 액정 화면 구석구석을 그 물티슈로 닦아내는 거였습니다. 


그 장면이 참 신선했습니다. 집에서도 집 앞 헬스장을 다니지만, 그런 광경은 좀처럼 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다른 기구로 옮겨가면서 운동하는 내내 물티슈로 자기가 사용한 기구를 닦는 모습은 거의 모든 이들에게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덕에 어제는 보이지 않던 키 큰 검은 통이 오늘은 보이더군요. 자그마한 물티슈를 뽑아쓸 수 있는 통이었습니다. 만약에 코로나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코로나 관련 거의 모든 제안이 해제된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습관 속에 자리 잡은 게 더 의미 있는 듯하더군요.  


게다가 자신의 중량에 맞게 사용한 기구들은 반드시 기본으로 하고 다음 기구로 옮기는 모습이 고마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벤치프레스를 하던 한 청년은 그 큰 키에 다리를 숙여 머리 부분, 엉덩이 부분까지 물티슈로 서너 번을 닦아 내더니, 자신이 올려둔 바벨들을 하나씩 꺼내어 옆에 가지런히 끼여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다음에 나의 중량에 맞게 꺼내는 데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대접받는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하지 싶었습니다. 돌아와서 그렇더라 이야기를 하니 아드님이 그럽니다. 저도 그렇게 하는데요, 여기는 다 그렇게 해요. 


그제. 아드님이 저녁밥을 먹다가 갑자기 묻더군요. 선진국은 왜 선진국이냐고. 나중에 듣고 보니 선진국 국민스럽지 않은 이들을 지난 3년간 꽤나 접했었나 봅니다. 아드님 스스로도 선진국이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하는 그런 나름의 기준이 있었지 싶습니다. 하지만 스물 하나. 아직 경험치가 많지 않으니 접한 이들도 그리 다양하진 않아서 생기는 실망이 양념이 된 질문인가 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부러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어제 처음으로 운전을 했습니다. 널찍한 도로에는 트레일러, 덤프 같은 거대한 트럭들이 참 많이 다닙니다. 하지만 그런 트럭 말고도 달리는 차들 중 상당수가 픽업트럭들입니다. 교통량이 꽤 많은 사거리에서도 좌회전 신호 없이 비보호가 많아서 어제 운전을 할 때는 꽤나 신경 쓰이더군요. 그러면 몇 초 지나지 않아 그 거대한 트럭들이 뒤에서 가라고 빵빵거리는 데 그 소리가 꽤 큽니다. 성질 급한 이들은 어디에나 있는 거니까요.  


어느 나라건 먹고사는 스케일이 우선 조건이겠지요. 그런데 어느 누구나 알고 있는 선진국의 기준 중 하나는 그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필수 기준이 아닐까요. 그 의식 수준은 바로 거대한 게 아니라 자그마한, 일상에서 보이는 것들일 테고요. 헬스장에서도 마트에서도 오고 가는 동안 절대 타인의 시선을 일부러 파고들어 쳐다보는 이들은 없습니다. 배려이기 이전에 적대적인 감정이 없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안심하라는 당부입니다. 그러다 마주치면 미간에 힘을 주는 이들보다 눈가에 주름을 먼저 잡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미소 속에는 너도 나도 고물가에 잘 살아내느라 고생인데, 여기 이렇게 식구들 먹거리를 바리바리 챙기러 퇴근하면서 피곤한데도 나왔는데 장을 잘 보고 가서 잘 먹고 잘 살아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라 읽히는 건 감성적인 오지랖만은 결코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남한테 관심이 없다는 게 아니라, 남의 관심사에 방해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건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교육으로부터 몸에 기억되게 배운 결과가 여든이 넘은 나이까지 이어지는 거겠다 싶습니다. 


아드님이 어린이 때부터 같이 응원하는 야구팀을 여기서도 내내 마음속으로 응원을 하는가 봅니다. 오늘 아침에 어제저녁부터 시작된 후반기 첫 경기에서 우승 후보인 상대팀에게 졌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올해는 뎁스가 가장 좋아서 아마 우승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자체 분석을 하더군요. 뎁스는 사전상 깊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스포츠분야에서는 특히, 야구팀에서는 후보와 주전의 실력이 엇비슷해서 누가 부상을 당해 다른 선수가 대신해도 좋은 성과를 낸다는 의미에서 쓰입니다. 우수한 선수들이 많다는 의미지요.


아드님이 질문한 선진국의 기준이 물론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게 우선이겠지만, 서로 잘 먹고 잘 살아야 된다는 거대한 사회적 합의 속에 윤활유처럼 작용하는 도덕적, 인간적, 환경적인 뎁스가 깊은 나라가 선진국이지 싶습니다. 남을 위해 땀을 닦고 신발을 정리해 주고, 기다려 주고, 먼저 양보하는 이들을 오버한다고, 오지랖이라고, 잘난 척 한다고, 바보같다고 몰아부치는 것부터, 나부터, 학교에서부터 줄여 나가야 하지 싶습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자식들이 그런 뎁스를 구성하는 중요한 사람으로 반듯하고 번듯하게 살아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유일한 바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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