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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l 23. 2023

셋이서 동네 한바퀴

Day 5 in Vancouver

어제는 점심을 먹고 나서 아드님의 일상 속으로 같이 걸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따님 유심을 사고, 노트북을 구경하는 거지만. 일부러 운전을 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걷다가 버스를 타고 내려 다시 셋이서 걸으면서 길거리를, 사람을, 차를, 이정표를 구경합니다. 그렇게 아드님이 3년간 살아 온 동네를 구경합니다. 걷다 보면 풀, 나뭇가지, 이정표도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퇴근하고 걷는 우리 동네 산책길에서 볼 수 있는 층층잔대 옆 블루세이지도 우리 셋을 향해 흔들흔들 천천히 몸을 기울여 인사를 해 줍니다. 어서 와. 이 동네는 처음이지. 


익숙함은 나의 눈과 귀, 마음을 묶어 버리기 일쑤거든요. 새로운 장면, 새로운 소리, 새로운 냄새. 모든 것들이 새롭다는 것은 묶여 버린 게 아니라 나의 오감이 다 열려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 작동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 말이지요. 신호등이 다르게 생겼습니다. ㄱ자로 꺾인 신호등 아래 화살표 아래 버튼을 누르고 기다립니다. 벌건색 손바닥을 쫘악 펼쳐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걸 보면서 자기 동네를 소개하는 아드님에 따님은 마냥 신나서 런어웨이를 할 준비를 합니다. 


쏜살 같이 달리는 차들, 천천히 양보하는 차들, 그 옆을 터덜터덜 걷는 이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하지만 달리는 차들의 생김새가 다릅니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시스템이 다릅니다. 501번 버스가 우리를 향해 달려옵니다. 버스 앞에 툭 튀어나와 자전거가 하나 묶어 있습니다. 아드님이 승객 자전거라고 알려 줍니다. 버스에 올라타니 기사를 둘러싼 유리막이 낯설지 않습니다. 나와 아드님은 2 CAD, 따님은 1 CAD 동전을 돈통에 집어넣으니 순서대로 하나씩 버스 티켓이 출력이 됩니다. 그걸 기사가 직접 한 명씩 건네면서 눈인사를 합니다. 이 티켓만 가지면 하루 종일 어디든 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2천 원이 안 되는 돈으로 하루 자유이용권이 생겼습니다. 



버스 맨 뒤에 셋이 나란히 앉아 버스 안을 내려다봅니다. 옷을 다 벗은 듯 한 커플, 온몸을 꽁꽁 싸 맨 듯한 여인, 하키채를 들고 있는 스킨 헤드 청년, 굵은 검은 안경테 속 눈동자가 불안 불안한 아저씨, 연신 몸을 흔들면서 헤드셋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한 학생. 그들 뒤로 노란 줄이 주욱 이어져 있습니다. 내리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줄이라고 합니다. 그 줄을 보니 갑자기 장인어른이 떠오릅니다. 장인어른 방에도 그런 줄들이 몇 가닥 있습니다. 누워서 형광등을 끌 수 있는 줄, 기대어 앉았을 때 눈높이에 맞춰 둔 휴대폰 거치대와 길게 이어진 충전 케이블, 누운 채 출입문을 열 수 있게 이어진 줄. 손재주가 좋은 장인어른은 온갖 실용적(?)인 줄들을 매번 잇고, 묶고, 자르고 하십니다. 


바쁜데, 사람~ 왜 왔어하면서 타주시는 노란 커피. 갑자기 당이 확 떨어지는 듯 그 커피가 먹고 싶어 집니다. 목적지에 내리기 전 아드님이 알려줍니다. 이 동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버스 스탑 버튼을 누르고 버스 뒷문 앞에서 한참을 서서 기다렸는데도 버스가 자동으로 열리지 않았다고. 그런데 자신을 룸미러로 쳐다보는 기사가 뭔가가 못마땅하게 화가 난 것 같아서 많이 당황했다고. 영어도 시스템도 지금보다 더 낯설었던 3년 전 에피소드. 스탑 버튼을 누르고 뒷문에 서서 버스가 정차하면 출입문 손잡이를 손님이 직접 푸시해야 문이 열린다는 건 한참이 지난 뒤에 알았답니다. 앞사람 덕분에. 


그렇게 우리는 넑직한 블록으로 되어 있는 중심 상가에 내려서 구석구석을 셋이 다시 한참을 걸어 다녔습니다. 전자 매장도, 도서관도, 펍도, 스벅도. 그렇게 한참을 걷다 넓게 비어 있는 잔디 구장을 발견하고 들어가 다시 한참을 걸었습니다. 그네를 여전히 좋아하는 따님은 냉큼 그대로 뛰어올랐습니다. 야구에 여전히 미련이 많은 아드님은 어느새 챙겨 글러브를 나에게 끼워 주고 맨손으로 공을 던졌습니다. 와인드업을 하는 아드님 뒤로 우리 동네에서 떴을 그 태양이 이 동네에서 이제야 지는 듯 노을이 파란 하늘에 몽글몽글하게 마음이 먹먹해지는 색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그제야 시계를 보니 저녁 9시가 넘었더군요. 환한 탓에 6시 조금 넘은 줄 알았습니다. 아, 여기 위도가 49도이니 서울보다 무려 약 11도나 북쪽에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네요. 이걸로 밥 먹고 살면서도 말이지요.

 


 따님의 온기가 남아 혼자 흔들거리는 그네 밑 우드칩. 초등학교 놀이터 바닥에 깔린 우드침을 3년전 비내리는 날 처음보고 참 신선했던 기억이 새록합니다. 어제는 노을에 비쳐 퍼덕거리는 멸치무리 같아 보입니다. 그 옆을 지나 3주짜리 우리집을 향해 다시 걸었습니다. 노을속으로 걸었습니다. 맞은편 인도로 지나가던 주인만큼 큰 사모예드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새하얀 털을 반짝거립니다. 잠시 멈칫 하더니 우리 셋을 쳐다보고 컹하고 묵직하게 한번 말을 걸고 시크하게 지나갑니다. 따님이 먼저 손을 흔들어 주었나 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이었다고 말하네요. 그러면서 다음 주에는 Oneday 티켓을 가지고 제대로 버스 투어를 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장면이 우리 셋의 오감에 와닿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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