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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05. 2023

휴대폰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Day 19 in Vancouver

지금 운전을 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는 유일한 내비게이션은 구글 지도다. 어제처럼 다운타운을 한참 걸어 다닐 때도 필수다. 우리 동네에서는 길 찾기가 여전히 안 되는 그것이. 그러다 보니 우리 동네에서 보다 훨씬 더 휴대폰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게다가 색다른 환경이나 남매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아내에게 실시간 중계(?)를 위해서라도 나의 휴대폰은 항상 주머니 속에서 들락 거린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살짝 습관적인 핑계라는 생각이 든다. 스티브 잡스가 떠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가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던진 혁신은 명확했다. 모든 것이 다 연결될 것이라는 것. 실제로 세상은 여전히 연결 중이다. 아주 치밀하게, 지속적으로. 그런데 느슨해지는 단 하나. 이 부분은 스티브 잡스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서울에서 KTX를 타고 2시간 넘는 거리로 출장을 갈 때였나 보다. 나 혼자 앉은 대각선 자리에 가족으로 보이는 네 명도 같이 출발했다. 그들은 가운데 테이블을 두고 둘씩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엄마, 아빠, 아들, 딸 같았다. 부모는 나와 같은 40대. 아들, 딸은 우리 남매와 비슷한 열 살 전후.  뭐, 예상되듯 서울역에서 출발하면서부터 내가 내리는 역까지 그 넷은 휴대폰을 하나씩 들고 각자 놀았다. 잘 놀았다. 한 번도 잠들지 않고. 그들의 눈은 제각각이었다. 아빠의 그것은 진지했고, 엄마는 촉촉했다. 딸은 고개까지 흔들었고, 아들은 초집중 상태로 손가락마저 바빴다. 계속 보고 있던 건 아니라 아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무렵 남매들의 목에도 휴대폰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휴대폰과의 전쟁 아닌 전쟁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전쟁에 서서히 끝나가지만 여전히 휴대폰은 계륵이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그 계륵에 대한 생각이 다시 짙어지고 있다. 다른 방향으로. 남매도 그 계륵에 대한 대화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양상은 부모 대 자식의 밀당이었지만, 다시 시작된 이야기는 효용성과 삶의 가치에 대한 문제로. 4남매 즈마야네 집에서는 물론이고 시내 맥도널드 매장, 조카가 근무하는 라멘집, 자주 가는 코스트코, 쇼핑몰, 컬터스 레이크 파크, 스페니시 뱅크 비치, 심지어는 길에서 흡연을 하는 이들 그 누구도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장면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아니, 그렇게 걷고 달리면서 돌아다니는 내 눈에는 없다. 아, 있다. 헬스장. 기구와 기구 사이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자주 보더라.  


이곳에서 코로나 3년을 가득 채운 아드님도 그런다. 버스 정류장에서 앉아서 진짜 버스만 기다린다고. 멍하니 바닥을 보거나, 지나가는 차를 보거나. 음악은 많이 듣는데, 휴대폰은 보이지 않는다고. 횡단보도를 기다릴 때도 진짜 그냥 기다린다고. 타운십인 이 동네 횡단보도는 대부분 보행자가 손으로 직접 눌러야 켜진다. 그러면 짧은 시간 안에 보행자 신호가 바로 들어온다. 다운타운처럼 시간에 맞춰 사람이 있건 없건 켜졌다 꺼졌다 하지 않는다. 베이비, 인펀트 데이 케어 센터에서 일하는 처형이 그런다. 이곳 커리큘럼에는 디바이스를 활용한 영상매체 수업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만지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같이 놀아야 한다고. 놀다 자고 일어나 먹고 하는 게 전부라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해야 하는 이유와 습관을 배운다고. 다음 주 화요일. 처형이 처음 이곳에 와서 6개월 넘게 근무했던 데이 케어 센터에 내가 방문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너무 기대된다. 


처형과 조카는 어제 퇴근하면서 따님표 깍두기 볶음밥을 먹으러 잠깐 우리 숙소에 들렀다. 그런데 입고 있는 셔츠 오른쪽 어깨, 가슴 쪽으로 벌겋게 말라 버린 핏자국이 한가득이었다. 한 살 반짜리 아가가 아장 거리고 걷다가 넘어지면서 자그마한 탁자 모서리에 입술이 터졌단다. 그 아가를 안고 닦아주다, 달래주다 그리 되었다고. 50 중반에 다시 아가를 키우는 일을 하지만, 재미있고 보람이 넘친다며 되려 걱정하는 나를 웃겨준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게 대부분 선진국의 가장 큰 교육 목표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하지만 실제 와서 같이 있으면서 보니 그게 현실적으로 더 실감 있게 다가온다. 


이 동네 산책을 하다 보게 축구 클럽 회원 모집 광고. 거기에 가입 가능한 나이가 두 살부터라고 쓰여 있다. 또 휘슬러 정상에서 만난 수많은 어린이들은 헬멧을 쓴 채 산악 자전거위에 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그 정상에서 아래로 MTB를 타고 달려 내려오기 위해 곤돌라를 탄다. 부모와 함께. 물어보니 대부분 열 살 전후. 우리 남매 목에 휴대폰이 걸리기 시작할 무렵 본격적으로 산악자전거의 재미에 빠진 거다. 옆에 있는 아빠가 그런다. 세 살부터 연습을 시작했는데, 놀라는 나를 보고 그게 왜 놀랄 일이지 하듯 양 손바닥과 어깨가 동시에 들썩 거린 후 어린이들을 뒤따라 달려 내려간다.    


우리 동네는 지금 횡단보도 바닥에 낮밤으로 번쩍거리는 바닥 신호등이 생기고 있다, 는 소리를 아드님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치다. 정작 휴대폰을 많이 사용하면서도 왜 그런 게 필요하지, 하는. 그런데 여러 곳에서 이곳에서 사는 이들을 만나면서 느끼게 된다. 갓 20대가 된 이들은 물론 10대들 조차도 항상 보호자, 어른들과 눈을 맞추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같이 운동하고, 걷고, 대화하는 동안 영어덜트 young adult들은 물론 어른들의 손에도 휴대폰은 보이지 않는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느낌을 받는다. 10대들은 무조건 몸으로 논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 사이에 수도 없이 어른들과의 대화가 진행된다. 밥을 언제 먹을 건지, 끝나고 어디로 이동할 건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할 건지, 언제 귀가할 건지, 이번 주 일정을 어떻게 조정할 건지부터 아르바이트, 진로 등에 대한 것까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어린들이 옆에는 항상 보호자가 있다. 지켜보고 있다. 우리 동네 모습처럼.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부모들은 눈을 액정 화면에다 가져다 놓지 않는다. 계속 눈으로 입으로 대화를 한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어도 어른들의 관심사로만 대화를 하는 경우 자녀들은 그 대화에 끼어들기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든다고 혼이 난 경험, 어렸을 때부터 아주 흔했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의 대화, 자녀들의 대화는 분절되어 있다. 그 사이 휴대폰이 생겼고, 어른들의 대화는 아이들의 휴대폰 사용 시간으로 재빠르게 대체되어 왔다. 물론 그 사이 인터넷 강의를 듣고, 모르는 정보를 찾고, 자기 일상에 활용하기 위한 효율적인 시간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경험상 빠르고, 웃기고, 신기한 것이 넘쳐나는 영상물이나 어떤 특정 관점에 빠져들기가 더 쉽다. 


같은 뉴스를 보고, 비슷한 관점을 추앙하고, 같은 영상물을 보고 웃고, 비슷한 정보를 소비하고, 남이 가진 것과 같은 것을 가져야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이라 스스로 안심하게 만드는 최첨단 디바이스. 아이들은 물론 우리들도 거의 모두 스마트한 휴대폰의 피해자이다. 스티브 잡스와 그를 따라잡으려는 이들이 간과했던 부분. 아니, 우리가 환호성만 지르면서 놓쳤던 부분, 그 부분을 지금부터라도 살려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소송이라도 걸고 싶다. 왜 휴대폰을 판매하면서 휴대폰 사용에 따른 위험성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화려한 기능으로 대변되는 효용성이 뺏어갈 소중한 가치의 상실을 왜 경고하지 않았는지. 상실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성장하는 어린 자녀들의 소중한 마디마디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는 부모, 자식 간의 긴밀하고 인간적으로 평등한 지속적인 대화라는 것을.  


30대에 나에게 자리 잡은 미국의 한 대학 연구팀의 종단연구. 여전히 내 삶에 존재하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위대한 실험 중 하나가 있다. 연구 대상은 하와이 제도의 한 섬. 그 섬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죽을 때까지 한 명 한 명 추적해서 삶을 해석하는 실험이었다. 지금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실험. 연구팀의 대가설은 '왜 사람들은 무너지는가'였다. 양육의 부재, 열악한 의식주, 범죄, 마약, 교육의 부재 등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고 타락하는지였다. 연구가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나면서 연구팀의 리더가 사망한다. 그 이후 그 연구를 이어서 진행하는 팀은 자신들이 세운 가설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수정된 가설은 '이 상황에서도 성공하는 이들의 요인은 무엇인가'였던 거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다들 무너지는 데 왜 그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정적인 요인을 물리치고 성공하는가.


결과는 끝까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 단 한 사람. 그 사람의 존재 유무였다. 마약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믿어 준 이와의 끊임없는 대화, 사랑의 대화였던 거다. 늦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자식 세대들에게 흔하게 하는 말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그 말을 나부터 실천하는 게 늦지 않았다. 지금이 오늘이 가장 빠른 첫날이 될 수 있다. 반성을 해야 할 부분은 명확하다. 내가 먼저 휴대폰을 화장실에 가지고 들어가지 말자. 밥 먹는 동안 내 눈에서 안 보이게 하자. 식사 중에 확인하지 말자. 되도록 알람을 꺼두자. 그 모습을 남매들 어릴 적부터 꾸준히 보여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휴대폰의 양면성을 잘 인식하고 자신들의 일상에 더 잘 활용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안에서 스티브 잡스와 그 추종자들이 놓친 것들을 지켜내면서, 분노의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면서 오히려 기능이 아니라 가치에 초점을 둔 새로운 디바이스를 개발하는 이들이 생겨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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