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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04. 2023

럭키한 하루

Day 18 in Vancouver

아드님은 어릴 때부터 무엇인가를 결정하는데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개 중 하나를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이다. 그 가격에 맞는 물건인지를 따지느라, 비싼 것들을 피하느라 더욱 그렇다. 가능한 예산이 정해지면 거기에 맞춰서 구입해 버릇한 게 가장 큰 이유이다. 반듯한 면이 있으면서도 답답하기 그지없을 때도 있다. 이제는 식구들 모두 그러려니 하고 넉넉하게 시간을 준다. 이번에 아드님을 만나러 오면서 아내와 상의하면서 꾸린 예산중에는 몇 가지 교체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학생용 노트북. 뭐, 대학생용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선택한 전공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는 성능을 가진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에서.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아드님이 찾아 보내준 많은 정보를 가지고 몇 개의 옵션을 정했다. 그래서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전자기기 샾에서 아드님이 원하는 성능, 합리적인 가격대의 노트북을 직접 구입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단 하루 만에 구입까지 완료한 게. 그다음 남은 교체가 휴대폰. 오늘은 휴대폰 교환 포함 두 가지 일정을 해결해야 하는 날이었다. 하나는 아드님 휴대폰 교체. 4년 전에 바꾼 아이폰 SE. 기계에 욕심이 없기도 하지만 돈씀씀이를 먼저 생각하는 아드님이라 잘 바꾸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무겁고 거대한 크기의 노트북도 중학교 입학하기 전 방학 때 스스로 모아둔 세뱃돈으로 구입했던 것. 그걸 몇 주 전까지 계속 쓰고 있었다. 와서 보니 노트북 액정도 3분의 1이 나가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3년 만에 아드님과 오늘까지 보름 넘게 지내는 동안 서너 번 바닥에 떨어 뜨렸다. 이제는 액정도 뒷면 커버도 죄다 깨져서 가루가 손에 묻을 정도. 하지만 그것 역시 액정 수리비 견적을 알아보러  아이폰 매장에 들렀다. 쇼핑몰 2층에 있는 매장은 매우 컸다. 


이런저런 조건을 알아보고 중간에 커피와 랩도 하나 먹으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 잠에서 깬 엄마와 통화를 한참 하면서 최종 결정. 아이폰 몇 무슨 모델, 칼라를 어떤 조건으로 구입하기로. 그렇게 다시 찾은 매장에서 2시간 넘게 상담을 해준 직원 단말기로 구입 절차를 진행하려는 데, 내 귀에 놉, 놉만 들린다. 결론은 구입 불가. 아뿔싸, 기계값을 한꺼번에 내지 않으려면 이곳에서 발급받은 크레디트가 있어야 한다고. 이런.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두어 달 되어가는 아드님은 자기 명의 크레디트가 아직 없다. 나보다 더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아드님은 돌아오는 내내 그 직원에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그 마음의 깊이는 더 깊어졌지만 과한 고민 시간은 아주 짧아졌다.      


다음은 전자 기기 매장. 지지난주 구입한 노트북 전용 펜을 하나 구입하러. 중앙분리대가 녹아내리고,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는 한국처럼 태양은 뜨거웠다. 하지만 나무 그늘에서는 잠시 시원해지리 만큼 자외선만 강했다. 이곳저곳을 지난 보름동안 현다이 앙트라제를 타고 다녔다. 처형네가 가지고 있는 3대의 차 중 가장 오래된 밴. 엔진경고등은 늘 들어와 있었고, 엔진음이 불규칙했지만 잘 달렸다. 노트북 전용 펜이 매장에 없었고, 온라인 몰에서는 130불이 넘는다며 아드님은 그냥 돌아섰다. 그렇게 리쿼스토어로 향했다. 옆 단지로 이사 온 40년 지기 친구에게 줄 와인을 한 병 사려고. 리쿼스토어 4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아드님덕에 원하던 와인을 하나 샀다. 마지막에 들린 곳에서는 앳되어 보이는 아드님의 신분증 확인을 요구했다. 앙트라제로 돌아오는 길에 남매는 오늘 뭐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날이네.


그리고 숙소를 향해 달리려 올라가는 두 개의 언덕. 그 언덕길은 1차선 외길이다. 이곳에 와서 거의 매일 오르락내리락했던 도로. 한인마트가 있어서 더더욱. 그렇게 그 한인마트를 지나쳐 언덕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계기판에 원래 켜져 있던 엔진 등 말고 배터리, ABS, 사이드브레이크 등이 동시에 켜졌다. 4 WAY STOP 교차로. 내가 출발할 차례. 앙트라제는 누가 뒤에서 손으로 밀어주듯이 그렇게 밀려 나갔다. 언덕을 오르긴 오르는데 20km의 속도를 내지도 못하면서. 룸미러로 보이는 뒤쪽에는 수십대가 차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얼른 비상등을 켰다. 이곳에 와서 비상등을 켜는 일은 딱 한번 있었다. 차선 양보를 해줘서 고맙다고 한국식으로. 이곳에서 비상등은 정말 비상 상황 때만 다들 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차는 아래쪽 언덕을 간신히 올랐다. 터덜터덜. 바로 뒤에 있던 하얀색 픽업트럭은 인상을 한번 찌푸리더니 한 손바닥으로 왓을 하더니 중앙선을 넘어 지나쳐갔다. 나는 왼손으로 연신 먼저 가라고, 고장 났다고 앞뒤로 휘저었다. 룸미러로 보이는 따님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지난주 조프리 레이크에서 노 서비스를 만났을 때의 그 표정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연륜(?)이 묻어 있는 아드님 역시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기 시작했다. 다시 스타트. 두 번째 언덕길은 오늘따라 꽤나 길어 보였다. 아래 오르막보다 실제 길긴 길지만. 그때 빨간색 픽업트럭이 뒤에 바짝 달라붙었다. 마치 차로 차를 밀어주려고 하듯이. 하지만 백인 운전자의 얼굴은 벌써 뿩, 뿩 하고 있다는 걸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나는 연신 팔을 휘저으면서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F**K $#$#^@## 을 원어민 발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아, 물론 그 발음마저도 아드님과 따님덕에 욕이라는 걸 알았지만.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앙트라제를 향해 거침없이 쏟아붓고는 차로 차를 옆으로 밀어낼 것처럼 바짝 붙었다 달려가면서 시커면 연기를 뒷구멍으로 뿜어내고 달렸다. 하지만 그 뿩을 집중할 겨를이 없었다. 비상등의 깜빡 거리는 소리마저도, 계기판의 초록색 화살표마저도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평지까지 올라는 왔다. 이제 앙트라제는 시속 10의 속도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회전하면 더 큰 4차선 대로. 직진해서 5km 정도를 더 가서 지나온 도로보다 경사 더 급한 타운하우스 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때 아드님이 소리친다. 아버지, 우회전, 우회전. 


처형네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이 그 길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이 동네에 익숙한 다 아드님 덕이었다. 그 길부터는 내리막이었던 거다. 묵직한 앙트라제는 그 덕에 내리말길을 알아서 굴러 내려갔다. 이제 됐어 하는 마음에 콧노래가 나올뻔 했다. 비상등은 켜져 있지만 운전석에는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몇백 미터를 내려와 좌회전 한 골목 안 가운데에 처형네 집이 있었다. 그 집이 보이는 순간 앙트라제 엔진은 멈췄다. 아니, 느낌에 멈추기 몇조 전이라는 직감이 왔다. 경운기가 막 멈추기 직전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렇게 정확하게 처형네 집 앞 주차장 턱 앞에서 앙트라제의 엔진은 완전히 멈췄다. 엔진이 멈추는 순간 계기판의 빨간색, 주황색 불빛들도 단박에 사라졌다.    


그때 아드님 폰으로 즈마야가 친구들과 비치 발리볼을 하고 있다고 올 수 있으면 오라는 연락이 들어왔다. 따님은 이미 조카에게 성공(?) 담을 전화기 너머로 알리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럭키한 하루다. 28만을 달린 앙트라제가 우리 셋을 태우고 마지막 멈춘 곳은 아름다우리만큼 적절하게도 우리 주차장이었던 거다. 이곳 시스템을 잘 모르지만 자동차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서비스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상이상 이란다. 그 정도 거리에서 레커가 정비소까지 가는 데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비용도 꽤나 비싸다고. 처형은 내내 길에서 멈추지 않고 내 집 앞에서 멈춘 건 수십만 원을 아끼면서도 남매들 안전까지 지켜 낸 대단한 일이라고 난리다. 


앙트라제는 처형 지인이 타던 차란다. 그 차 한 대로 시작해 지금은 승용차가 두 대 더 있다. 이쯤 되면 꽤나 벌이가 괜찮은 상황이지 싶지만 그렇지 않다. 각자 직장 위치가 다 다르고 근무 시간대가 다 다르고 위치까지 다르니 어려워도 차가 필수란다. 그러다 보니 무리해서 차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앙트라제는 두 번을 이상하는 동안 요긴하게 쓰다 올해 폐차를 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더 타야지 했단다. 보름동안 앙트라제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나였다. 자그마한 승용차 하루 렌트비만 따져봐도. 처형이 후다닥 말아낸 시원 냉모밀과 바삭한 생선가스를 늦은 저녁으로 먹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쉽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고단한 이민자의 생활 속에서 오히려 더 럭키한 일들은 더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자동차가 고장 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풀이 죽어 집에서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을 십 대. 그런 위기(?)가 언제 있었냐는 듯 남매가 친구들과 비치 발리볼을 시작한 것 역시. 마음에서 잘 털어내는 연습이 한 겹 생긴 것도 럭키하다. 그렇게 남매가 친구들과 모래 위에서 맨발로 웃는 동안 나와 처형은 먼저 돌아왔다.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처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처형네 옆집 이웃이 어정쩡하게 주차장 앞에 서있는 차를 보면서 다가와서는 자기한테 배터리가 있는데, 한번 고쳐 보자고 그랬단다. 콜롬비아에서 농과대학을 나온, 정이 많은 부부란다. 


결과적으로 그 부부가 가지고 있는 배터리가 맞지는 않았지만 내일 배터리만 구입해 오면 자신이 해주겠다는 말을 남겼단다. 지금 콜롬비아에서 엄마가 한 달 정도 머물 예정으로 방문이란다. 그래서 그 집이랑 출국 전에 파티를 하루 하자고 제안을 했다. 날을 한번 잡아 보겠다고. 툴툴 잘 털어 버리는 건 그 어떤 유산소 운동보다 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든다. 위기에 더 잘 뭉치는 건 강력한 항산화 작용이지 싶다. 오늘 되는 게 하나도 없네라고 내뱉는 에너지가 그럴 수도 있지, 문제없어, 오늘은 꽤나 럭키한 날이야로 짧은 시간에 전환되는 남매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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