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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25. 2023

2023년 8월 24일

지금 막 일어나서 랩탑 앞에 앉았다. 갑작스럽게 코에서 뜨거운 게 조르륵 흐르는 것 같다.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손으로 훔쳤다. 콧물이다. 아마도 어제 혈관과 근육을 갑작스럽게 과도하게 쓴 뒤 차가운 에어컨에 한참 노출되어서 그런가 보다. 그런 날이 있다. 이런저런 별일들이 종합세트처럼 폭폭 일어나는 날. 그런 날이 어제였다. 개인적으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문만 열고 나가면 출근 시작이다. 여느 아침처럼, 어제도. 그런데 어제는 문을 열자마자 이랬다. 새벽에 배송된 택배 상자가 터져 있었다. 터진 유리병에 들어 있던 액체가 모조리 쏟아져 흘러 있었다.


올리브유였다. 그냥 내버려 두고 출근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집 안 이었다면 밀가루를 사용해서 뿌려둔 뒤 기다렸다 살살 쓸고 닦고 할 텐데. 게다가 허리 통증으로 마음대로 자세를 취할 수도 없는 상황. 그래서 일단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루마리 화장지 3개를 사용했다. 시간은 이미 지각이었다. 그것보다 기름이라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끄러웠다. 그게 더 위험했다. 그래서 관리사무소에 상황을 전했다. 옷은 이미 주말 대청소할 때보다 더 젖어 있었지만 갈아입을 새가 없었다. 8월 24일. 마음이 한없이 바쁜 하루이기 때문에.


그렇게 막 나가려는 사이 가족톡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따님이었다. 일정이 맞지 않아 혼자 먼저 나간 따님이 지하철역에서 미끄러졌단다. 내 발밑처럼 그렇게 미끄러웠던 거다. 반팔 아래 팔꿈치 부분을 주욱 갈았단다.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허리, 허벅지, 발목, 손목 어디 다른 데는 당장 괜찮은지 톡을 보냈다. 유난히 미끄러운 신발 바닥으로 조심스레 흙에 문지른 뒤 차에 올랐다. 시동을 켜자마자 훅하고 불어 나오는 에어컨에 몸이 오싹했다. 그 뒤로 라디오가 자동으로 켜졌다. 오늘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시작하는 날이란다. 몇 시간 뒤인 오후 1시. 뭐, 다 준비된 축제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이제 그만둔 지 오래인데, 커다란 마을 수호신 아래 평상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은 이들도 요즘은 그리 안 할 텐데. 이들은 지금도 쿵작이 잘도 맞는구나 싶어 져 괜히 부화가 치밀었다. 몸은 으스스한데 머리는 뜨거워지는 걸 느낀다. 아내는 요 며칠 내시경과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있다. 생전 처음이다. 언제든지 병원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 나와는 반대다. 병원을 싫어, 아니 무서워해서 그렇다.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면서 스무 해를 넘게 살았다. 우리 아버지 같다. 그런데 엄마가 폐암 수술을 받으신 후 달라지고 있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그런데 오늘 몇 가지 결과가 좋지 않다. 갑상선에 꽤 큰 종양이 세 개나 있단다. 양성 종양이어서 추적 관찰이 필요하다는 소견이다. 경동맥에 노폐물이 쌓여 있는 게 꽤나 크단다. 그냥 갱년 긴가 하면서 열이 나고 잠을 설친다한게 꽤 오랜데 그 이유를 이제 찾은 건가 보다. 그러는 사이 따님이 톡에 사진을 하나 더 올렸다. 쓰라린 팔꿈치로 학원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고. 그런 모습으로 이른 아침에 학원에 도착한 모습에 담당 선생님이 너무 안쓰러우셨나 보다. 직접 내려가 이런저런 것들을 사다 주셨단다. 늦은 저녁에는 링크 하나를 더 보냈다. 오염수 반대 집회를 하던 대학생들이 무더기로 연행이 되었다면서. 


2023년 8월 24. 오늘은 12년 동안 고생한 아이들이 수능을 보기 위해 원서 접수를 시작하는 날이다. 이 날이 어찌 보면 앞으로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마음속에서는 처음으로 세상에 어떻게 부딪혀 볼까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첫날일지도 모른다. 그날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는 앞으로 30년간 천천히, 천천히 바닷속에 뒤섞여 숨어드는 첫날이 되었다. 30년이 아니라 석 달 뒤면 사람들의 하찮은 기억 속에서 오염수는 그냥 바닷물이 되어 사라질 거라는 걸 위정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 테다. 30년 뒤 따님은, 오늘 원서를 접수한 아이들은 4, 50대가 될 테다. 나는 80대다. 어떤 세상이 기다릴지.


여전히 눅눅했지만 아내는 나의 손을 이끌고 황톳길로 향했다. 반려견 타닥이도 데리고. 그렇게 걸리고, 안고 하면서 셋이서 산책을 했다. 타닥이 덕분에 한 사람씩 번갈아서 황톳길을 맨발로 걸었다. 내 차례가 되어서 아내가 타닥이를 황톳길 옆 숲길에서 걸리는 사이, 나는 기분 좋은 흙장난을 했다. 하루의 피로가 단박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우산을 펼치진 않았다. 비 덕에 황톳길 나지막한 부분에 모여 있던 황토가 진흙이 되었다. 일부러 거기에서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보드라운 기분을 느꼈다. 맨발로, 맨가슴으로. 


비가 점점 더 굵어졌다. 하지만 머리뒤에 토도독 떨어지는 빗방울이 괜스레 기분 좋아지는 건 어떻게 일부러 막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맨가슴으로 기도를 드렸다. 타닥이를 안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아내에게 눈으로 먼저 대답을 하면서. 아내의 몸속에 있는 덩어리와 노폐물이 다 사그라지고, 씻겨 내려가라. 살다 보면 이런 날 저런 날 있을 텐데 이날도 저 날도 다 내 날이다. 따님아, 비 오는 날 햇살이 그리워지고, 금방 이 뜨거운 여름이 보고 싶어 질 테니, 그날 그날 충전을 잘해서 그 기운은 나눠 쓰는 연습을 잘해주라. 그 선생님처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아빠는 그래서 이렇게 오늘을 기록한단다. 잊지 않기 위해. 미안함을 잊지 않기 위해.




----------(한줄 요약)

왜 쓰냐고? 잊어도, 잊어도 다시 읽으면 기억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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