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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24. 2023

괜찮아 솔직히 이야기해도

[동네 여행자]1_사진:unsplash

아빠, 어제는 정말 태국인 줄 알았어. 엄청 습했지? 내 팔을 이렇게 포개면 끈적거리는 정도가 에구. 그런데 00대 역에서 지하철은 또 왜 그렇게 늦게 오는지? 한 삼십 분 가까이 늦어진 것 같아. 어제는 머리를 감고 말리고 자야지 하다가, 아빠 드라이기 방에 갔다 놓고 이렇게 이렇게 멍하니 눈뜨고 내적 갈등을 했잖아. 말려야지, 말려야지.


아빠, 커피를 안 먹으면 졸리고 먹으면 배가 아프고. 어쩌지? 그냥 커피를 먹지 말을까. 아, 그러면 수업시간에 졸리는데. 어제도 근데 배가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 학원 그 층에 여자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어서 볼일을 보기가 쉽지 않아.


아빠, 근데 나 00이랑 에버랜드 갈 거다. 갈 거라고. 간다니까. 아, 왜 안 물어보냐고. 언제 갈 건지. 왜 안 물어보냐고.  근데, 어제 00 대역에서 한 삼십 분은 기다린 듯. 사람은 왜케 많은지. 근데 다 대학생 같긴 하던데. 00대 가기에 어렵지는 않지, 높아?


아, 맞다. 근데 아빠. 나 이렇게 입으면 키가 어때 보여? 괜찮아.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 나는 이렇게 입으면, 다리가 드러나면 키가 작은 느낌이 들더라고. 몇 같지 보여? 응? 백육십칠이 넘어 보이지는 않지? 그렇지? 괜찮아. 사람들은 나를 백육십칠 넘게 보더라고. 나 컸지? 괜찮아. 솔직히 얘기해도 돼. 몇 같지 보여?


아침 7시가 되는 걸 보면서 출발하면 보통 네 번째 신호등까지 7-8분 정도 걸린다. 그 정도 시간이면 그날 아침 일팔 청춘 따님의 텐션을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열여덟 따님과의 대화는 일단은 속도에서, 이단은 어휘에서도 밀리지만 그래서 더 재잘거리는 걸 듣기만 해도 좋다. 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다고 말해줘서 더 좋다.


어제 내리는 빗속에서도 아내와 나는 황톳길을 걸었다. 흠뻑 젖어 군데군데 진흙으로 변한 길이 발가락 사이를 쪼록 하게 간지럽히는 기분이 좋다. 온 우주가 내 안에 가득 들어찬 기분이다. 그 우주에다 대고 크게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데, 괜찮아,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되는 상대가 둘이나 있어 더욱 좋다.  


아빠, 그렇게 내가 걱정돼? 나 지금 출발했어. 내가 세상을 다 이겨. 걱정 마. 잘 먹었어. 아침에 챙겨준 거. 그런데 솔직히 얘기해도 돼. 아빠, 나 머리 이렇게 앞으로 하는 게 더 나아, 요렇게 뒤로 하는 게 더 나아. 어? 어? 어떤 게 더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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