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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01. 2023

지리하다

[#알쓸#지리]3

나는 지리 선생이다. 스물다섯 해 동안 지리 선생이었다. 앞으로 십 년 가까이 지리 선생일 거다. 그런데 그 지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위기다. 분명 다행이다. 지금껏 그 지리 덕에 사회인 구실을 하고는 있지만. 내가 왜 지리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는 이런저런 글에서 가끔 이야기를 했다. 이글에서는 그 이야기가 핵심이 아니라, 패스. 가끔 아이들이 그렇게 되묻는다. 선생님은 왜 지리를 전공하게 되었냐고. 그런데 그 물음 속에 포인트는 '왜'이다. 앞뒤 질문의 정황상, 문맥상. 안타깝다는 표현이 쏘옥 들어차 있는. 물론 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그렇게 안타깝다고 여긴 적이 없었지만.  


세계사적으로 지리라는 과목은 지금도 여전히 매우 강력한 기초 학문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나의 주장이 아니라, 대부분 선진국의 초중고 커리큘럼만 봐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무조건 외워야 하는 어려운 과목, 재미없는 과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금 중년들의 학창 시절 기억 속에서도 그럴 거다. 한국의 모든 학교는 대학이 우선이다. 그 시스템 속에서 이 과목은 필요하고 필요 없고 가 거의 전부다. 당연하다. 그런데 그 필요라는 게 공부하기 쉬워, 안 쉬워. 점수받기 쉬워, 안 쉬워가 또 전부다. 또 당연하다.


그래서 지금, 위기의 한국처럼 위기의 한국..... 지리다. 공부를 열심히, 아니 잘하는 아이들마저도 그런다. 지도를 외워야 하는 게 쉽지 않다고.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어릴 적부터 책을 읽지 않아서, 지금 그렇게(?)된 것처럼, 어릴 때부터 지도에 익숙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 꾸려진 민간 디지털 맵 업체에서 근무를 했다. 그 당시에는 디지털맵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이 되지 않았을 때. 기억하시는지. 오래전 지금의 대구지하철을 공사하던 현장에서 굴착기로 인해 지하 도시가스가 누출되었다. 밤새 새어나간 가스가 지하 공간을 채우고 있다 출근길에 터졌다.


많은 사상자가 난 이후, 우리나라는 지하매설물도를 디지털로 만드는 작업을 국립지리원을 통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디지털맵 사업이 AI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기 전부터 차량용 내비게이션 지도가 되어 매립형, 거치형 하면서 한창 유행을 했던 거다. 그 맵들이 지금은 내 폰으로 들어와 있는 거다. 이 글에서 지리라는 과목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것보다 지도를 읽어 내고 자기 의견과 적절하게 필요한 정보를 뒤섞어 표현해 내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디지털맵이건 종이 지도건 그것들을 자기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가미된 정보를 걸러내서 의사결정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는 더더욱 중요하게 차이가 날 개인 능력이 되는 거다. 그 능력이 없으면, 부족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중간 브로커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을 감당해 내야 할 거다. 아이들한테 그런다. 고등학교까지는 국영수인 것 같지만, 인생은 음미체라고. 한 사람에게 10대일 때의 삶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말도 맞도 저 말도 맞다. 그런데 인생 길게 보면 심미적 감수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위치한 장소, 공간에서 적절한 정보를 활용하여 자기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 결국 시시프즈의 형벌을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먹고살기 위해 그 형벌을 이겨내야 한다지만, 그 속에서 삶의 질이 조금 더 달라지는 게 크게 영향을 끼치는 그 사람만의 능력임은 분명하니까.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고3들이 졸업하기 전에 꼭 전해주는 다양한 '지리'들이 있어 전한다. 우리나라에는 참 다양한 '지리'가 있다. 그중 하나가 '나는 이곳의 지리에 어둡다'라고 할 때의 그 지리. 내가 지금 밥 벌어먹고살고 있는 그 지리다. 일정한 곳 - 장소, 지역 등으로 불리는 일정한 공간 범위.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이 공간에서 머무른다 - 의 자연환경 - 산, 들, 바다, 구름, 해와 달, 별 그리고 계절, 바람... - 과 인문 환경 - 취락(농산어촌과 도시), 인구, 농업, 공업, 상업, 교통통신 그리고 다양한 정보 - 에 대해 알아보는 과학 분야다.


그다음은 복지리, 대구지리 할 때의 그 지리. 그 지리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천진난만,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자꾸 묻는다. 해맑다. 그래서 해맑게 대답해 준다. 어, 그거는 맑은탕이라는 일본어야. 대구, 경북 대구 아니고, 생선 대구. 그 생선을 넣어 맑게 끓인 거,라고. 그리고 잘못 끓이면 죽을 수도 있는 복어 알지. 배가 불룩한 거, 그거 넣고 끓인 맑은 국물. 그걸 일본말로 지리라고 불러. 그러면 더 해맑게 또 묻는다. 아, 그럼 선생님, 어부지리는 무슨 지리예요. 후하, 하. 했다. 예전에는. 그런데 지금 아이들한테는 그러지 않는다. 일단 고맙다. 지리라는 단어를 써줘서. 그리고 나도 알기 때문에. 지금 아이들은 성적에 관계없이 어휘에 약하다. 우리나라 말 절반이 넘게 뒤섞여 있는 한자어는 더더욱. 그래서 또 말해 준다. 고기 잡는 남자(어부야~)가 얻은 이익이야. 이런 표현 알지. 손 안 대고 코 푼다, 아니 숟가락만 올렸을 뿐인데. 바로 그거야.  


어떤 아이는 사진을 찍어와 보여주면서 물은 적도 있다. 어, 선생님 우리 동네 슈퍼에서 지리를 팔아요, 지리. 크크크크. 그리고 보여준 사진 속에는 '지리멸치'라는 이름에 가격표가 노랗게 잔멸치 사이에 꽂혀 있다. 그래 맞다. 이것도 지리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뭐 그런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서 추어鯫魚, 멸어蔑魚라고 하는 그 멸치야. 알지, 살아있는 멸치를 직접 본 적이? 없지. 거의 없어. 멸치는 잡아 올리면 급한 성질 때문에 바로 죽어 버리거든. 죽으면 상해. 그래서 잡은 배에서 일단 쪄. 우리 귀에 익숙한 앤초비(anchovies). 그게 멸치야. 아주 가는 멸치, 즉 세멸, 음 그러니까 가느다랗다는 세, 멸치 할 때 멸. 세멸. 보통 몸길이 3cm 이하의 볶음용, 비빔용 멸치를 지리멸치라고 불러. 멸치 중에 가장 큰 게 너희 집 냉동실에 있을 거야. 디포리. 그거야.


지리하다는 뭔 뜻이어요? 아, 그거 그거는 지리 공부를 아주 아주 열심히 잘하다, 는 뜻이지.라고 농담으로 던진다. 이번주 며칠을 내린 가을비처럼 '지리한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할 때 쓰이는 표현이다. 표준어 지루하다한테 자리를 내 준 방언, 잘못된 표현이다,라고 구분해서 설명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지리하다는 시간을 질질 끄는 상태를 말하고, 지루하다는 말 그대로 따분하고 지겹다, 즉 boring을 뜻하니까. 한 달 전 밴쿠버에서 차가 고장이 났다. 어찌어찌 카센터를 갔다. 이미 수리하는 차는 없었는데, 사무실에서 앉아 있는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고 느릿느릿 천천히. 나만 애가 탔다. 그렇게 시간을 지리하다 끌었다.


지리적 상상력과 심미적 감수성이 풍부하게 조화된 사람들은 항상 동네를 사랑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자신이 머무는 곳에서 충분히 행복한 요소를 찾아낸다. 그리고 찾아낸 것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 표현 방식이 음미체다. 그리고 쓰고 찍고 달리고 걷고. 항상 그 동네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찐뜩하게 풍요로운 정신적인 삶의 모태가 지리다.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어디가 더 비싸고 좋은 위치 인지야 말로 AI가, 디지털 디바이스들이 다 알아서 해결해 줄 지리다. 어제 뜬 슈퍼문은 찍은 다비이스 성능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먹고살다 보니 내 꿈이 한 가지 더 생겼다. 그건 바로 '지리하다'는 말이 '고데하다'는 말처럼 동사로 쓰일 수 있도록 잘 알려내는 거다. 지리하다는 지루하다, 시간을 끌다가 아니라 Geographic Doing.



-----(한줄 요약)

10대 때부터 지리적 상상력과 심미적 감수성이 범벅이 되는 삶은 상상만 해도 짜릿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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