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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31. 2023

순대에 싹이 났다 뽀야뽀야뽀야

[풀하우스]14

한 달 가까이 집을 떠나 있었다. 다행히 그 사이 아내가 임파첸스 3남매 - 윤봉선, 윤선화, 윤화롱 - 를 살려놨다. 한여름의 열기와 집중 호우, 과다한 습기 속에서. 평소에 나만 바라보던 3남매들뿐만 아니라 우리 집 군데군데 있는 모든 화분들이 그렇게 여름을 잘 버텨내었다. 


집으로 돌아와 시차 적응을 하는 사이, 두 번째 그로로팟이 도착했다. 내가 신청했던 건 바질. 다시 알뜰하고 정성껏 포장된 꾸러미들을 봉선, 선화, 화롱이 3남매가 예쁜 꽃을 피우는 앞에 서로 기운을 주고받으라고 펼쳐 놓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정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하루 이틀 흘러갔다. 너무나도 재빠르게.

 

이유는 낮 시간 동안 스물여덟의 다 다른 잠재력을 숨긴 씨앗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자신이 어떤 꽃을, 열매를 맺을지를 모른다. 그냥 열심히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어찌어찌 되겠지, 하는 모양새다. 물론 나는 이런 모습을 가진 멋진 꽃이 될 거야라고 하는 씨앗들이 있지만, 극소수다. 


몸집이 크고 말하는 것만 보면 씨앗이라고 표현하기 거북(?)스럽지도 하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다 보면 영락없는 씨앗이다. 아직 새싹도 드러내지 못한. 반짝이는 눈망울 속에서 기대와 환희가 그득 들어찬 씨앗도, 스스로 새싹이 되기를 거부하는 듯 자책하는 씨앗도, 그냥저냥 밋밋하기를 원하는 씨앗도. 


하지만 씨앗은 물만 잘 만나면, 바람만 잘 통하면, 햇살만 흠뻑 머금으면 자신도 몰랐던 포텐을 터트린다. 만개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 반 스물여덟의 포텐들 역시 우리가 그랬듯이 막연한 두려움을 다른 씨앗들과 힘을 나누고, 격려하면서 극복하는 중이다. 


그러는 사이 지난주, 이번 주. 12년 동안 이 한 두 주 만을 보면서 달려온 스물여덟의 포펜들. 그들의 학교생활기록부를 입력하고, 확인하고 있다. 수십 번을 읽으면서 고쳐 쓰고 있다. 이 새벽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 뒤 한낮 동안 또 다른 글을 계속 쓰고 있는 거다. 


물론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한 쓰기이지만 그 속에는 나의 평가 문장도 뒤섞이기 때문에 명백한 글쓰기이긴 하다. 그러는 동안 여름 방학 때부터 진행되어 온 입시 상담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아이 한 명당 서너 번씩은 진행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러는 사이 요청이 들어오는 학부모 대면 상담도 진행이 된다. 


지난 2주간. 새벽에 읽고, 쓰고 출근 준비를 하면서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게 바로 바질 꾸러미였다. 거실 한쪽 3남매 앞에 주르륵 놓여 있는. 그래서 며칠 전에는 잠깐 무릎 꿇고 앉아 바질 씨앗만 먼저 꺼내 봤다. 자그마한 종이봉투 안에서 참깨 같은 10개의 씨앗이 어슴푸레한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미안했다. 


물만 주면 되는데, 물만 주면 되는데..... 하지만 머릿속에는 다른 글들이 흘러 다니고 있었고, 몸은 다른 것에 더 바빴고,라는 건 바질한테는 순전히 핑계로만 들리겠다, 싶었다. 자그마한 봉투 속에 갇힌 지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집에 와서도 벌써 1주일이 후다닥 지나가고 있는데.... 


결국 지난주 토요일. 바질 씨앗 봉투를 개봉했다. 자그마한 접시에 물을 담고 10개의 또렷한 씨앗에 처음으로 물을 부어 주었다. 그렇게 하루를 불렸다. 일요일 아침에 보니까 꽤나 통통해진 것처럼 보였다. 크고 얕은 접시 - 아내가 파스타용이라며 새로 구입한 네 개 세트 중 하나 - 에 펠렛 10개를 올려놓고 물을 부었다. 


각자의 펠렛들이 순식간에 물을 빨아들이면서 폭폭, 포포폭 소리 내듯 부풀어 올랐다. 오래간만에 쉬면서 옆에서 지켜보던 열여덟 따님이 아이들 폰으로 영상을 찍어서 보내줬다. 한 이십 분 넘게 물을 붓고, 빨아들이고, 다시 물을 붓고, 빨아들이고를 두 번 반복하는 동안 같이 온 스포이드로 씨앗 하나씩 정성껏 펠렛 속으로 쏙쏙 이사를 시켰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지 2주가 다 되어서야 펠렛이 통통한 순대가 되었다. 영상을 찍던 따님이 그런다. 아, 쌈장에 순대 찍어 먹고 싶네. 그리고 딱 이틀 지난 어제 새벽. 그 순대 속에 숨어들었던 씨앗이 이제 자기 새싹을 하나둘 씩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모습은 언제나 경이롭다. 어떻게 그렇게 단단하고 자그마한 씨앗에서.


보드랍고 진하고 여리지만 당차 보이는 새싹이 쏘옥 머리를 내미는 과정은 목덜미가 시원해질 정도로 기분 좋은 오한이 느껴지는 것 같은 지경이다. 느닷없이 아주 어릴적 손놀이할 때 뜻고 모르고 친구들이랑 같이 불렀던 뽀야뽀야뽀야가 입안에서 오물거렸다. 소름이다. 모양은 영락없는 불은 순대지만 펠렛이 온 힘을 다해 키워내고 있는 거다. 씨앗을 새싹으로. 그 새싹 속에 씨앗이 고스란히 전해준 특성, 개성을 간직한 채 언젠가는 터트릴 꽃망울, 열매를 예고하면서.


행정적으로는 오늘이 스물여덟 포텐들의 학교생활기록부 완성 마감 시간이다. 그리고 내일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를 위한 원서 접수를 스물여덟 포텐들과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나에게 온 꽤나 큰(?) 씨앗들이 자기의 특성, 개성을 찾아내고 터트릴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발걸음이다. 



파스타 접시 위에서 부풀 대로 부푼 순대 속 새싹을 보면서 집을 나서기 전 아마 나는 기도를 하는 것 같다. 오늘도 내가 만날 씨앗들이 너처럼 얼른얼른 마음껏 부풀어 보라고. 하라는 것보다 하지 못하는 게 더 많은 게 현실이지만. 포기하지 말라고. 그냥 햇살만, 물만, 바람만 잘 받으려고 자신을 열어 놓으라고. 그러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또 다른 새싹을 틔우려고 혼자의 시간을 시작하는 스물 아드님에게도 그 기도의 에너지를 전한다.



------(한줄 요약)

모든 씨앗은 포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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