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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02. 2023

오늘은 내가

[동네 여행자]2

2023년 9월 2일 0시를 기준으로


지구인이 된 지 464,199시간이 지나가는 중이다. 오늘에 있어 보니 그렇다. 어마무시한 시간이다. 1만 시간이 무려 마흔 일곱 바퀴를 향해 가고 있다. 올해 52번째 가을을 맞이한다. 내 의지대로 느끼는 가을이 그보다 더 적지만. 그래도 그동안 참 많은 것들을 했나, 싶지만 순식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둘째로 태어나 첫째가 되었다. 이 시간이 고스란히 나의 부모님을 지구에서 처음 만난 지 그만큼 흐른 시간이다.


처음 학교를 간 이후 389,775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잠깐 태어났다 떠난 형 덕에 1년을 늦게 내 인생이 시작되었다. 연년생 형 덕(?)에 몸이 약했단다. 그래서 8살에 시골 학교에 들어가 비로소 국민이 되었다. 들어가서도 잘 다니나 싶어 일하다 말고 걸아와 교문틈에서 나를 자주 훔쳐보시곤 했다고. 그랬던 어린 내가 지금도 학교에 머물고 있다. 학교 덕에 어른이 되었고 학교 때문에 선생이라 불리고 결혼하고 지금의 남매를 만나고. 아직도 학교 다녀하고 친구들이 가끔 놀리는 맛이 이제는 조금 난다.  

 

부모를 떠난 지 319,760시간이 흘렀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는 겨울날. 2월 마지막주. 지난주 스무 살 아드님이 그랬듯이 집을 떠났다. 처음 가는 바닷가 동네에서 꿈에 부푼 고등학교 생활을 혼자 시작했다. 혼자 먹고 혼자 자고 혼자 왔다 갔다 하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하고 혼자 울고 혼자 웃고. 물론 그 사이사이에 지금도 만나는 친구들 덕에 혼자라는 걸 지울 수 있었지만, 잠깐이다. 결국은 나 혼자였다. 그 혼자가 참 좋았고, 외로웠고, 두려우면서도 행복했다.

 

아내를 마음으로 만난 지  218,899시간째다. 지금 건너편 아드님방에서 자고 있다. 그 사람은 대학 신입생 때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마음이 가까워진 건 졸업하고 내가 대학원생, 아내가 직장에 다닐 때. 그 근처에 볼 일이 있다고 핑계(?)를 데고 만난 백운역 앞 2층 카페. 그 시각으로부터 25년 가까이 흘러가고 있다. 지금도 창가자리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친구의 모습에 내 심장이 콩콩거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는 커피가 아니라 노란 국화차를 마셨다. 아, 캐모마일이었나 보다.

 

부모가 된 지 178,788시간이 흐르고 있다. 남매는 3살 터울이다. 태명이 아지였던 큰아이가 이제 스무 돌 5개월이 되어 간다. 수면 내시경 약을 먹고 임신이 된 사실을 알고 10개월을 넘게 마음 졸였던 작은 아이. 낳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만 했던 그 긴박했던 상황은 우리 부부와 부모님만 알고 끝까지 가기로 했다. 택시 안에서,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소리 없이 흐르던 아내의 눈물이 지금은 웃기만 해도 찔끔 흐르는 눈물로 바뀌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다.


학부모가 된 지 126, 951시간, 그러는 사이 교사들을 위한 첫 책을 낸 지 100,176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잠깐 공저를 하긴 했지만, 완벽한 두 번째 책은 10년 가까이 셀프 독촉만 받고 있지만. 아, 그리고 이 공간에서 처음 이곳에다 글을 쓴 지 17,184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곳에다 매일 글을 쓴 지 4,344시간째다. 그러면서 내 안의 어린 나로부터, 그 어린 나를 둘러싼 부모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어제 아내로부터 긴 장문의 메시지를 건네받아 읽었다. 어려서, 지켜야 할 게 많지 않아서, 잃을게 별로 없어서 나선 다는 3년 차 교사의 다짐과 각오였다. 그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을 아내의 눈가가 다시 붉게 변하는 걸 봤다. 218,899시간 동안 지켜본 아내다. 머리를 돌린다고, 마음이 읽히지 않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지구를 떠날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이 245,280시간 정도 남았단다. 2021년 남자 기대수명을 기준으로.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가부좌를 틀고 몇 시간을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내 인생의 몇 시간을 빌려서 길거리에서 함께 서 있기만이라도 해야겠다. 몇 시간 뒤에.


어딘가에 앉아 목청껏 외칠 그 선생님. 친구가 그리워 더욱 목놓아 울부짖을 그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항상 오늘은 오늘이다. 지금껏 계속 그랬다. 수십만 시간이 흘러도, 앞으로 또 수십만 시간이 흘러오더라도. 어제도 오늘이었고, 내일도 오늘이다. 기억을 더듬거나 미리 생각해 볼 뿐. 숨 쉬고 발딛고 있는 그때는 언제나 오늘이다. 그 오늘을 나는 항상 지금이라고 부른다. [지금, 언제나의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글 속으로 숨어들려는 나를 내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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