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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06. 2023

에어로 부드럽게

[세상의 모든 물견]2_에어패드


한 달여 만에 집에 돌아와서 두 번째로 한 일이 차를 살펴보는 거였다. 다다음날 월요일, 출근하기 전에. 내 차는 8년, 18만 킬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 이 차에는 출고 후에 개인적으로 단 원격시동기가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내 차의 상태를 알 수 있다. 그걸 차 안에 심어 두어서 나는 자동차 키가 없다. 폰으로 열고 닫고 켠다.  


8년 전. 차를 출고받고 몇 달 뒤. 남매 어릴 적 지인들과 태국 여행을 갔을 때다. 차는 인천 공항 근처 공영주차장에 주차해 둔 채. 겨울이었다. 방콕 공장에 내려서 일주일짜리 유심을 사서 끼웠다. 같이 간 네 식구 어린들이 거의 동시에. 


그런데 여행 일정 한 사흘 지났었나. 내 휴대폰 메모리만 쭉쭉 줄어들었다. 길 찾기 정도만 하고 있는데도. 그때 귀국해서 방전된 차를 보고 처음 알았다. 아, 24시간 대기하면서 내 휴대폰과 연동하느라 계속 이 차 배터리를 사용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 이후 연동을 삭제하고 멈추게 하는 법을 알고 잘 사용해 왔다 

.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시동이 걸리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폰이 안되면 앞유리에 부착된 번호판에서 비번을 누르면 된다. 그런데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일요일 아침 긴급 출동을 신청했다. 


이십여분 만에 달려온 기사분.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분명 이십 대 같아 보였다. 보조개 깊게 패이는 해맑은 미소. 새하얀 얼굴 때문에 촬영을 위해 일부러 작업복을 입은 듯 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차문을 여는 예전 방법을 더듬거렸다. 


잠긴 차문을 강제로 어떻게 열까. 그렇지. 얇고 긴 쇠칼(?) - 사극에서 가끔 나왔던 춤추던 백정의 그 칼의 미니 버전 정도 -을 운전석 문 유리와 틈 사이로 쑤욱 집어넣어 이렇게 요렇게 손목으로. 그렇게 조금은 과격한 물리적 방식을 상상했다.


하지만 출동한 그 기사분이 자기 차에서 꺼낸 건 A4 용지 반만 한 까만 고무 지갑같이 생긴 것. 그 끝에는 예전 병원에서 혈압 체크할 때 쓰던 것 같은 길쭉하게 둥그런 고무 튜브가 달려 있었다. 손으로 꾹꾹 쥐어짜듯 누르면 에어가 쉭쉭하고 들어가 던. 


얇은 고무 지갑 같은 것을 앞문과 뒷문 사이 좁은 틈에 살짝 끼웠다.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양손으로 꼬깃꼬깃 접었다 폈다 반복했다. 고무 지갑 끝부분이 애처롭게 그 틈에 끼어 있듯 축 늘어졌다. 그러자 역시 새하얀 자그마한 손으로 둥그런 부분을 잡고 꾹꾹 눌렀다. 천천히 천천히.   


새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천천히 천천히 에어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게이지를 보는 것처럼. 그러자 토라져 있듯 나를 외면했던 차가 조금씩 열렸다. 아주 조금씩. 그 벌어진 틈으로 끝 부분이 기억자로 꺾인 굵은 긴 철사를 넣었다. 그리고는 살짝 당겼다. 문 안쪽 손잡이를. 그렇게 문은 열렸다. 


10점 만점에 10점을 부탁, 해도 되냐며 물을 때는 볼이 살짝 붉어지는 것 같았다. 처음 영업을 나갔을 때 내 얼굴도 그랬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했다. 10점 만점에 100점을 체크하고 싶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결국은 시동을 켠 채 두 시간 가까이 강제 드라이브를 했다. 하지만 결국 두 시간의 주행에도 2년 조금 넘은 배터리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그날 그 기사분을 한번 더 만나야 했다. 


그날 몇 시간 동안. 세상을 부드럽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로 해야 하는 게 넘쳐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도 그 얇은 고무지갑처럼, 그 고무지갑에 달린 튜브처럼. 그런 모습으로 그런 역할로 살아내는 방법을. 눈에 보이지 않는 에어가 단단하게 닫힌 문을 살짝 열어 놓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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