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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13. 2023

어디 가서 뭐 하고 살까!

[세상의 모든 물견]3_컴퓨터

오늘은 병원진료를 가는 날입니다. 8월 말에 한 검사 결과를 보고 아마 젊은 주치의의 잔소리를 또 한 번 들을지도 모릅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그런 다짐을 합니다. 시키는 대로 잘 지켜야지, 골라서 잘 먹어야지, 먹지 말라는 건 조금 먹어야지, 운동 더 꾸준히 해야지. 그런데 스스로의 이런 약속을 어느 정도 잘 지키고 주치의 앞에 앉아도 별반 다르지는 않은 것 같긴 합니다. 뭐 잘못한 게 크게 없는데도 순서대로 불려서 하얀 가운 앞에 앉으면 괜히 쫄려요.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고. 무슨 한 소리 크게 들을까 봐.   


그런데 그 몇 분 안 되는 시간 동안 주치의의 눈은 대부분 모니터에 가 있습니다. 오랜 주치의가 정년을 한 뒤 그 자리를 물려받은 듯한 내 또래 주치의. 이전 주치의보다는 훨씬 환자 친화적(?)입니다. 우선 모니터의 방향이 내가 앉아 바라보는 각도로 돌려줍니다. 그리고는 마우스로 수많은 수치 하나하나를 가리킵니다. 이건 높아야 하고, 이건 높으면 안 되고. 이건 요만큼이 정상인 거고. 클릭을 해서 확대된 영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얀 이게 정상이고, 검은 저게 뭐고 하면서.    


8월 14일부터 시작된 대입 상담이 1차 종료되었습니다. 월요일부터 아이들이 상담으로 얻은 결과를 가지고 수시 원서 접수를 시작했습니다. 내일모레, 금요일이 접수 마감입니다. 수시에서 유니(버시티)의 경우는 총 6개까지 쓸 수 있습니다. 정말 가고 싶은 유니인 경우 가끔 전형 유형을 달리하면 같은 대학 같은 과를 2개 쓸 수도 있습니다. 우리 반은 모두 스물아홉 명입니다. 마지막 번호 29번 산은 처음부터 직업위탁생이어서 진학을 하지 않습니다. 보통 위탁생이라고 줄여서 부릅니다. 일반고에 있지만, 특성화고(마이스터고) 학생들처럼 취업을 전제로 국가에서 지정한 직업기관으로 등하교해서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입니다. 정해진 일정에만 본교로 등교하면 됩니다. 산은 멋진 요리사가 되고 싶어 합니다. 벌써 양식,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내는 걸 보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원래 고3 상담은 진로진학상담입니다. 대학을 전제로 하는 진학상담을 포함해서 뭐 하고 살고 싶은지 그 아이의 이십 대 삶을 전반적으로 이야기 나누는 진로가 포함되는 거지요. 그런데 8월 14일부터 지금까지는 진학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일정이 진행 중입니다. 대입 수시 원서 접수 기간이니까요. 우리 반 스물여덟의 진로진학 방향은 꽤나 다양합니다. 7, 10, 11, 12, 15, 19, 22, 23, 24, 26은 유니를 준비 중입니다. 2년 반동안 챙겨 두운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 속 내용을 바탕으로 원하는 대학, 학과를 잘 고르는 중입니다. 모두 3차례 이상의 상담을 통해 학과와 대학을 정했습니다. 한두 개를 미세 조정 중이지요. 그런데 특히 유니를 준비하는 아이들과 상담을 할 때는 학교에서만 볼 수 있는 화면을 통합니다. 환자로 앉아 있을 때 보여지던 그런 화면처럼. 


전국의 모든 고3 담임들은 이 프로그램을 활용합니다. 다만, 그 학교 그 아이의 다 다른 성적 데이터가 들어가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특정 대학, 특정 학과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지원하는 아이들끼리의 상대적인 비교가 가능합니다. 현재 학년을 기준으로 3년 전 데이터까지. 그래서 외부에서는 볼 수 없는 시스템입니다. 저의 개인 노트북에서도 원천적으로 실행이 불가능한 시스템입니다. 오직 학교 내 자리에서, 학교망으로 운영되는 학교컴퓨터에서만 가능합니다. 아이들과 단 둘이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어릴 적 진학상담이 노련한 선생님의 촉, 감이었다면 지금은 객관적인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유니를 선택할 때는 대학, 학과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전형 유형이지요. 같은 학과를 지원해도 전형 유형이 다르면 서로 경쟁상대가 아니니까요. 학종, 교과, 논술, 실기, 특기자, 정원 내, 정원 외....  수천 개가 넘는 전형 유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간단하게 구분하면 일반 전형과 특별 전형으로 나뉩니다. 선발 인원의 대략 80-90%가 일반 전형으로, 나머지가 특별 전형으로 뽑힙니다. 농촌 지역에서 오래전 세워진 우리 학교의 많은 아이들은 특별 전형 지원이 가능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나 유치원 때부터 자라온 아이들이 많거든요. 


우리 반 4, 6, 9, 17, 20, 21, 25, 28은 컬리지(전문대)만 준비하고 있습니다. 컬리지도 유니와 같이 원서 접수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유니가 이번주에 마감되는 것과 다르게 접수 기간이 한 달 가까이입니다. 그래서 이번주 유니 접수가 마무리되면 다음 주부터는 다시 이 아이들의 상담을 세밀하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니와 다르게 컬리지는 지역구입니다. 굳이 컬리지를 집에서 먼 다른 지역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16, 18, 27은 유니와 컬리지를 동시에 준비하고 있고, 단짝은 1서와 13람은 연기와 보컬을 준비 중입니다. 이 둘이 우리 반에서 표면적으로 제일 바쁜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강행군중이네요. 


누나가 의대에 다니는 22 민은 그만큼 성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오로지 수능을 통해 의료 관련 학과를 진학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또 우리 반에는 2 영, 3나, 8연 이렇게 셋이 미진학 예정입니다. 2 영은 엄마 사업을 도울 예정이고, 3 나는 할머니의 나라로 유학을 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8연은 가진 자격증으로 취업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스물아홉 아이들과 한 학생당 서너 차례 이상의 상담을 마쳤습니다. 이제 어제, 오늘부터 천천히 개별 접수를 시작하면 됩니다. 접수가 끝나면 특별 전형에 지원하는 아이들 서류 제출 절차가 남았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공식적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공문서를 직접 발송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절차도 잘 가르쳐 줘야겠습니다.  


상담이 마무리가 되는 이맘때만 되면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던 컴퓨터란 물건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많은 정보들을 차곡차곡 모았다가 그 아이의 개인 정보만 입력하면 누적치가 주르륵 뜹니다. 물론 그 화면을 읽어 내고, 보이지 않는 데이터를 찾아내서 해석하는 능력이 경력치에 따라 나오는 요즘 고3 교사들의 전문성입니다. 같은 화면을 보고도 다른 대안을, 가능성과 위험 정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건 학생들의 성적이나 생기부 리터러시(학교생활기록부 해석 능력)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 능력을 아이들은 금방 알아냅니다. 더 많이 찾아보고, 공부해 오는 아이들도 꽤나 많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학생 친화적인 선생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 그러냐. 하면서 모르는 건 빨리 우리 반 애한테 배우고, 나의 감, 촉은 유감없이 발휘해 주고. 그렇게 같은 컴퓨터, 다른 내용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 수많은 데이터는 결국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데이터를 읽어 내고 설명을 듣고 하면서 꿈꾸는 세상은 단 한 가지. 잘 먹고, 잘 살아낼 수 있기를, 그렇게 살아낼 수 있었으면 하는 기원과 각오의 소통. 그것입니다. 컴퓨터를 넘어 사람끼리의 행복한 소통, 그게 넘치는 세상 속에서 서로 다 잘 먹고, 잘 살아가기를. 스물아홉 명의 영혼들도 그 세상 속으로 풍덩 잘 스며들기를.




-------(한 줄 요약)

빅데이터도 사람을 연결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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