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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30. 2023

생전 처음 날리는 연, 놀리는 추석

[동네 여행자]10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터벅터벅 땅만 보고 걸어갑니다. 뒷모습 여기저기에 심통이 잔뜩 묻었습니다. 둘이, 넷이 타는 자전거를 할아버지가 빌려 준다고 하신 말씀에 단박에 꽤나 먼 저 안쪽 잔디밭에서 입구까지 5분을 넘게 달려왔는데 실망이 이만저만 아닌가 봅니다. 내 손을 먼저 잡고 달리듯 나를 끌고 할아버지를 따라오면서 미리 일러두긴 했습니다. 연휴라 그분들도 가족들이랑 쉬셔야 해서 아마 오늘은 자전거를 빌리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래도 초등학교 4학년. 남동생네 막내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합니다. 굵은 옛날 소시지 같은 종아리가 잔뜩 화가 나 있는 게 보입니다. 생전 태어나서 처음, 추석을 진짜로 놀면서 보내는 날인데 말입니다.


그건 오십이 넘은 나도 처음인 거 마찬가지입니다. 추석을 문화재청에서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하나 봅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차례 문화, 가족 문화를 후세대에게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겠다 싶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강제로라도' 가족이라고, 모이라고 법적으로 만들어 놓은 빨간 날을 이어 가자고 말이지요. 율아, 혹시 모르니까 저기 문 열어 놓은 마트에 가볼까. 연을 팔수도 있을꺼야. 연 어때? 연. 그 소리에 율이의 표정은 다시 큰아빠, 큰아빠 하는 개구진 얼굴로 금세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행히 연세트를 하나 손에 쥐어 줬습니다.   


베이버 부머 세대인 엄마 아버지, 그 보다 몇 해 더 일찍 시작한 어머님 장인어른. 여느 집안처럼 그렇게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수십 년 반복하면서도 결코 즐거운 일만 있을 수는 없었다고 이제야 고백들을 하십니다. 육 남매 장남과 결혼한 육 남매 막내에게는 고단함을 넘어 피눈물 뒤섞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을 수밖에 없겠다 싶습니다. 반에 반에 반도 하지 않은 우리도 쉽지 않은 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 세대들에게 쉼이 없는, 결코 즐겁지 않은 명절을 물려줄 수는 없을 겁니다. 아니 일로만, 임무로만 다가오는 그런 유물들은 결코 물려받지 않을 겁니다.


몇 해 전부터 아내, 동생네와 함께 합리적이고 가족적인 분위기의 추석. 헤어졌다 다시 만나 설레고 고맙고 수고했다고 서로 토닥일 수 있는 추석. 쉼이 있는 추석을 만들려는 시도를 꾸준하게 해 왔지요. 그 마무리를 처음으로 제대로 하게 된 게 올해 추석입니다. 해외여행보다 더 좋은 근처 공원으로의 나들이. 추석 나들이는 올해가 첫날입니다. 2, 3년 동안은 집에서 차례 대신 산 사람을 위한 음식을 나눠 먹고 푹 쉬었지요. 그리고 연휴 기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는 시간을 각자 가졌지요. 그 기간이 초4 조카정도의 나이 때 그냥 종합선물세트를 받고 몇 날 며칠을 장롱 위에서 하나씩 꺼내 먹던, 어린 나의 추석이었는데 말이지요.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걸렸네요. 엄마 아버지는 65년의 시간이 더 넘게 흘렀네요. 함께 살아 있는 서로에게 감사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는 제대로 나를 놀리는 첫 추석 날이.


자전거 대신 연과 얼레를 손에 쥔 율이의 표정은 다시 세상을 다 가진 듯합니다. 다시 내 손을 먼저 잡는 바람에 펄럭거리는 연은 내가 반대쪽 손으로 들고 뛰어온 꽃길을 둘이 같이 걸었습니다. 돗자리 위에서, 스윙 체어에 앉아 있던 엄마, 동생, 제수 씨, 아내, 따님, 율이 보다 두 살 더 위인 람이 까지. 일제히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줍니다. 멋쩍어하는 율이  볼이 발그스레 빛납니다. 사흘 내내 내리던 비 다음에 쨍하게 좋은 햇살을 받아서 더욱. 그리고 몇 천 원 하는 기성품 연 하나에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빠, 큰엄마, 엄마, 아빠, 누나들이 초록이 넘치는 잔디 위에, 율이 주변에 다 같이 빙 둘러 섰습니다. 없는 바람을 한꺼번에 다 같이 만들어 주기라고 할 것처럼.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우리 식구들 사이사이로 없던 바람이 강바람이 되어 불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머플러가 날리고, 아내의 머리카락이 날리고, 나의 바지가 펄럭거립니다. 난생처음 연을 잡아봤다는 초등학교 4학년 율이. 너무 늦지는 않았다 싶습니다. 그렇게 오후 내내 잔디 위에 두 다리를 고정한 것처럼, 불러도 불러도 식구들이 있는 그늘로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자그마한 체구에도 두 다리 딱 버티고 처음 날려보는 연을 단단히 잡고 당당하게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 모습을 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가족들의 눈빛에 바람 같은 초록이 가득합니다.


그날 율이는 연을 날리는 법도, 연은 날리다가 나뭇가지에 걸린다는 것도, 걸렸다고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것도 한꺼번에 온몸으로 기억하고 돌아갔습니다. 나를 꼭 안아주고서. 그 순간에 나도 초4의 내가 되어봤습니다. 희미한 백열등 아래 작은 공간에서 수많은 날들을 더위도 추위도 지겨움도 외로움도 이겨내면서 그렇게 그렇게 날 준비를 했던 나를. 바람만 있으면 햇살만 좋으면 그렇게 자유롭게 날 줄 알았던 나를. 떠나 보지 않은 세상은 언제나 나를 위해 존재하고 기다려주는 줄 알았던 그때를. 세상밖으로 날아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나를 단단히 붙잡아 주던 연 줄은 언제 끊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게 사라진 사실을 처음 알았던 그 기억을.



바람을 만나야 연은 연다운 연이 됩니다. 어린 율이에게는 그 바람 중 하나가 가족이었으면 합니다. 율이의 어린 기억의 앨범 속에 가장 좋은 자리에 딱 펼쳐진 힘이 되는 장면이었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날다가 나뭇가지에 걸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지는 걸 느끼면서 자신을 잡아 준 나뭇가지를 또 다른 기회로 만들기를. 잡아주면 달아나려 하고 놓아주면 잡아달라 하는 게 인생일지 모른다고. 서로 달아나려 하고 잡아달라 할 수 있을 때가 가장 힘 좋고 느낌 좋은 때였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한 줄)

같은 날, 우리는 함께 처음이었습니다. 율이는 연이, 우리는 진짜 제대로 나를 놀리는 추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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