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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04. 2023

나도 23살이었다

[세상의 모든 물견] 6




'오, 내무반장님, 서울 사람이십니까?',  '와! 윤병장님. 축하드립니다'.



내무반 총기 보관함 맞은편에 관물대 위. 자그마한 은색 TV 화면 가득 검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투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병장 일 호봉. 내무반장 견장을 찬 첫 달이었다. 내가 응원하던 우리 팀, 엘지트윈스가 4년 만에 다시 우승을 했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최종 우승. 그제야 조금은 편안하게 TV를 쳐다보면서 좋아할 수 있었다. 후임병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나는 1월 5일. 한 겨울의 정점에 신병 훈련소에 입소했다. 기본 훈련기간 외에 다시 추가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동기들보다 자대 배치가 몇 주 늦었다. 자대 배치를 받은 다음 날 새벽 1시 - 2시 근무를 서야 했다. 그렇게 짜여서 있었다. 오만 긴장에 내가 내가 아닐 때였다. 


잠결에 머리에 금이 가고 피가 철철 흐르는 꿈을 꿨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소총 개머리판으로 자는 내 머리를 툭하고 친 거였다. 공태우가. 그렇게 그 선임과의 악연은 시작되었다. 그때도, 토요일 오후에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자그마한 그 은색 TV는 혼자 시끄럽게 떠들어 데고 있었다. 드라마 D.P2를 가끔 보다 보면 과장인 부분이 있다, 고 하는 이들이 있다. 맞다. 우리 일반 보병이 D.P들 생활 만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힘들게 만들기 위해 하는 구조는 같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참다 참다 큰 일(!)을 저지를 수 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인과 관계도 같다. 


하지만 오늘은 뭐 나와 동갑이었던 6개월 선임 공태우의 만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병장이 되고, 내무반장이 될 때까지 마음 편안하게 TV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은색 TV 앞에 진을 치고 채널을 독점한 건 공태우 무리들이었다. 고졸이라는 그는 나를 대학생이라고, 서울이라고, 엘지트윈스라고 더욱 미워했다. 내 추측이 아니라 소각장에서 몇 번을 먼저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프로야구를 같이 좋아하는 팬이라고 또 같이 흥분하기도 하는 이쌍한 사람이었다. 그가 응원하던 팀은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한 해태타이거즈였다. 그런 와중에 우리 팀이 그해 우승을 한 거였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나는 대관령을 넘어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에 처음 왔다. 초등학교 2-3학년때 서울에서, 유명한 배우 하희라의 옆집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고 하는데 기억이 또렷하게 나지는 않는다. 공주 드레스를 입고 마당 수돗가에서 놀던 그 아이가 그분이었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나와 서울은 그 정도 인연이었다. 그런데 서울을 연고지로 하고 있는 엘지 트윈스가 스무 살 내 마음에 '우리 팀'으로 자리 잡은 건 순전히 재국이 형 때문이었다. 지금도 모 스포츠사에서 기자를 하고 있는 대학 일 년 선배다. 자취를 시작했던 신입생 때. 거의 매일을 재국이 형네 자취방에서 잤다. 지금도 여전히 먹지 못하지만, 그때는 술 아니면 야구이야기가 전부였던 형들 틈에서. 


나는 혼자 집에 가기 싫어서 술자리란 술자리는 늘 찾아다녔었다. 몇 잔 먹으면 벽에 기대어 잠들기 일쑤인 촌놈이 기특했단다. 지금은 전 세계로 흩어져 살고 있는, 그 자취방 멤버들은 거의 나와 같이 지방 출신이었다. 그런 동병상련에 술, 야구라는 공통된 관심사 덕분이었을 거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레 형들 틈에 끼어 엘지 트윈스 펜이 되었다. 우리는 자취방에 모이기만 하면 소주를 마시면서 야구 이야기를 했다. 끊임없이 했다. 그럴 때마다 재국 형은 척척박사였다. 우리들 사이에서 야구 박사였다. 모르는 게 없었다. 지나간 경기 결과 정도가 아니라 전력을 분석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특정 선수의 개인사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형은 아무리 술을 먹어도 그다음 날 아침에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을 나가 돌아다니가 들어왔다. 그게 그 형의 유일한 주사였다. 그런데 그 양손에는 가판대에서 판매하던 700원짜리 스포츠 신문이 두세 개 들려 있었다. 그 덕에 나도 그 신문을 자주 보게 되었다. 라면 받침으로 쓰고도 쓰고, 화장실 용으로도 쓰기도 하면서. 형은 지금 그때 사 모으던 스포츠 신문사 중 한 곳에서 제법 잘 나가는 기자가 되어 있다. 중간에 위암을 이겨낸 형은 지금도 여전히 색다른, 깊이 있는 시선으로 야구팀을, 선수를 분석해 내는 기사를 쓰고 있다. 


그 형 덕에 나의 팀이 된 엘지 트윈스. 내가 제대할 무렵에는 상대할 팀이 없을 정도로 강한 팀이었다. TV를 틀면 언제나 이기고 있었다. 지고 있어도 그냥 뒤집어서 이길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 역전해서 이기는 경기가 정말 많았다. 공태우의 팀과 같은 전통적인 우승팀을 밀어내고 있었다. 승리가 당연해지는 팀이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항상. 휴대폰은 물론 TV도 내 자취방에는 없었다. 그래서 나도 재국 형 덕에 스포츠 신문이라는 걸 가끔 사서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정말, 스물세 살 나의 팀이 되었다. 


1994년. 그해에도 나의 팀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했다. 2위와 무려 11게임이 넘는 차이로.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우승을 했다. 소위 말해 기자들 입장에서 쓸만한 기사감이 없을 정도로 싱겁게.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언제나 이기고 언제든지 우승, 아니 준우승은 항상 할 것 같은 나의 팀이. 그 후로 29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스물셋의 나는 오십이 넘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도 한참 지난 세월이었다. 


어제 나의 팀은 경기 없이 휴식일이었다. 오후 1시에 부산으로 오늘 경기를 위해 출발을 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나의 팀은 원정 가는 버스 안에서 29년 만에 정규리그 우승을 했다. 2위에 8게임이 차이로. 남매들이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 자연스레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다 나 때문에. 아내는 재국이 형은 알지만, 야구는 잘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 친구였다. 그런데 한참 매주 경기장을 갔다. 그렇게 나의 팀은 우리 팀이 되었다. 때로는 아빠 잘못 만났다고 내가 나의 팀 대신 욕을 다 먹기도 했지만. 


지금 우리 집에도 TV가 없다. 그런데 이제는 29년 전과 다르게 패드도 있고 휴대폰도 있다. 패드로는 2위 팀 경기를, 휴대폰으로는 3위 팀 경기를 켜 놓았다. 두 팀이 모두 상대팀에게 지는 순간, 아내와 따님은 함성을 질렀다. 따님은 옷장으로 달려가 가을 야구 때 입으려고 오래전, 아주 오래전에 사두었던 유광점퍼를 꺼내 들고 와 입었다. 둘이서만 자주 잠실 직관을 가던 고등학교 절친과 톡을 하고, 사진을 공유하면서 응원가를 불렀다. 거실에서 껑충껑충 응원 댄스를 하면서 우리가 정말 우리 팀이 더 진하게 되었다. 공태우의 눈치를 보면서 마냥 기뻐하지 못했던 29년 전의 내무반은 그렇게 나의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구가 그런 존재가 있다. 심리적으로 아주 가깝게 스스로 생각하는 대상. 그는 나를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만 나오면 행복해진다. 그냥 좋다. 나의 수많은 그런 대상 중 한 분이 바로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다. 공부를 하면서 읽으면서 나 혼자 든 생각이겠지만. 어제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99세 생일을 맞아 가족끼리 조촐한 파티를 했다는 기사를 우연히 봤다.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던 의료진의 말을 끝내기 안타를 날리듯 거뜬히 살아내고 있다.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 케어만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남은 시간을 아주 소중하게 집에서 쓰겠다고. 


그 시간 속에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 로절리 여사와의 눈 맞추면서 나누는 소박한 대화, 현안에 대한 뉴스 챙겨 보기 그리고 메이저리그 불멸의 기록 - 야구 박사 형한테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다. 이 팀은 메이저리그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에 소속된 팀이다. 그런데 그 지구에서 무려 10년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10년 연속. 그래서 야구 기자들 사이에서는 세금, 죽음, 브레이브스 지구 우승. 이 세 가지는 세상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농담이 생겼을 정도란다 - 을 가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팀 경기를 보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진다. 야구를 좋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자기가 살아온 동네를 돌아보고, 자기 주변을 돌아보면서, 그 일상에서 소중한 것들을 찾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 때문이다. 기필코 내 삶의 마지막에도 따라 배워야 할 태도이기 때문이다. 학벌과 인맥이 아니라 실력을 갖고 직접 찾아가 야구 기자가 된 형처럼 그리고 나의 20대 때처럼. 아드님도 따님도 한 팀이 되어 본 경험, 무언가를 위해 헌신했던 기억, 가라앉는 마음을 포기하고 않고 지켜냈던 추억,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동네가, 밋밋한 듯 한 나의 일상이 가장 훌륭하다는 진리를 몸과 마음에 가득 새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우리 팀 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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