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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13. 2023

더 커진 대구덕에

[#알쓸#지리] 8



일이란 게 늘 그렇다. 하루에 하나씩, 일주일에 하나씩 일어나면 좋으련만. 그런 날을 맞이하는 건 쉽지 않다. 업무도, 대소사도 다 몰려든다. 오늘 이 일이 어제 그 빈 시각에 주어졌더라면 더 잘 해낼 텐데. 이번 이 일이 그때 그 상황이었다면 더 멋졌을 텐데.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들은 항상 문 밖에 언제나 몰려 있었다. 다만 나의 문이 항상 꼭꼭 닫혀 있을 뿐. 일단, 문만 닫아오면 외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항상 닫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가끔 열면 그때다 하면서 밀려드는 거지 싶다. 바람처럼. 평소에 그 문을 빼꼼하게 조금만 열어 두면 될 일이다. 나와 너, 이곳과 저곳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은 상태로. 그러면 그 좁은 틈으로 항상 자유롭게 드나든다. 얇지만 질 좋은 종이 한 장 만큼. 그 종이 위에는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고 그릴 수 있다. 온전히 내 용도로만 쓸 수 있는 백지다. 그 종이는 바로 '그럴 수도 있 지'.


그 백지를 자주 활용하다 보면 좋은 습관이 많이 생긴다. 자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구름과 달, 별에게 이야기를 걸어 볼 수도 있고. '멍하게' 화단 속 피어난 들꽃을 유심히 쳐다볼 수 있다. 간단하게 사진 한 컷만 찍으면 이름 모르는 생명을 처음 알아낼 수도 있다. 배꼽에 힘을 주고 심호흡만 몇 번 해도 안개 같은 생각이 단박에 사라지는 '멍'한 상태를 자주 경험할 수 있다.


 I zoned out for a second. '멍 한' 상황을 영어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 잠시 멍 때렸어. 행간의 의미가 너무 좋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몸은 여기 있지만 생각은 잠시 원하는 곳으로 갔다 올 수 있는, 초능력. 그런데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가 가질 수 있는 초능력. 하지만 연습을 게을리하면 절대 경험하지 못하는 초능력. 알아서 멈추고 물 한잔 먹으려고 움직이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심호흡하고. 잠깐 눈감 감아봐도 좋은.


매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재를 직접 쓰고, 편집해서 pdf로 제작한 지 십여 년이 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만의 그 시즌이 시작되었다. 작년 버전 그대로 써도 당장 큰 문제는 없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지 않다. 소위 버전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기출문제도 바꾸도, 단원별 주제별 발문도 바꾼다. 지금 아이들하고 수업하면서 만난 오류나 아이디어를 첨가한다. 무엇보다 효율적이면서 효과 좋은 나만의 교재를 만들어 보려는 의도이다.


그러다 보니 나만의 존 아웃 방법이 생겨버렸다. 정말 효과 만점이다. 무려 60분 가까이 '멍 때리기'가 가능해진다. 아마 이 연습 충분히 하면 멍 때리기 대회에서도 우스운 성적으로 초반에 떨어지지는 않을 듯. 바로 지도 그리기. 정확하게는 희미하게 그려진 백지도를 좀 더 진하게 따라 그리는 지도 필사다. 배운 게 도둑질, 아니 지도 그리질이니까. 기존 교재나 웹이 공개된 백지도를 활용하면 마음처럼 선명한 지도를 아이들에게 제시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올해 지도 필사의 시작은 커진 대구 덕분이다. 대프리카 대구광역시. 올해 7월 1일. 대구 위에 있는 군위군이 대구광역시 군위군이 되었다. 행정 편입이다. 작년 12월 국회에서 '경상북도와 대구시 간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며 결정됐다. 대구시와 경상북도는 2020년 7월 군위군의 대구 편입 전제조건으로 군위군 소보면과 의성군 비안면에 대구경북통합 신공항을 짓기로 합의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지자체 간 합의로 통합한 첫 사례다.



이에 따라 대구시 면적은 884k㎢에서 1498㎢로 무려 70% 넓어졌다. 전국 특별시, 광역시등의 대도시 중 가장 커졌다. 인구는 군위군의 2만 3219명이 추가돼 238만 명을 넘겼다. 예산 규모도 17조 가까이로 5천억 증액되고. 그런데 7월에 결정된 내용이라 아직 기존 교재나 웹상에 군위군이 포함된 제대로 된 지도가 없다. 그래서 매년 그랬듯이 올해도 대구를 핑계로 내년 쓸 교재에 포함될 21개 시와 도의 지도를 새롭게 그리기 시작했다. 위에 있는 지도가 어제 필사한 거다.


지도를 그리다 보면 멍 때리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다. 그냥 초집중 상태에 5분도 지나지 않아 빠져든다. 나름 엄청난 성취감과 희열까지도 경험하게 된다. 지부심이랄까. 내가 직접 그려, 내가 전달하고 싶은 방식으로, 설명할 때의 단단한 책임감과 자신감. 그렇게 어제 60분 가까이 공강 시간을 활용하면서 심지어 허리 통증마저 잊었다. 물론 위 지도를 필사한 뒤 통증을 풀어내느라 쉽지 않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인간은 참 대단하다. 나도 인간이다. 고로 나도 참 대단하다. 그렇게 많은 생각들을 이고 지고 산다. 내 꼬리에 덕지덕지 매달아 끌고 다닌다. 그 덕에 내 꼴이 말이 아닐 때도 있다. 그런데 또 할 일은 다 해낸다. 안 할 일도 만들어 해낸다. 대구덕이란 핑계로 지도 필사를 시작하고, 기다리지도 않는 글을 꾸역꾸역 쓰려는 것만 봐도. 그래도 먹고살다 보면, 그냥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 지' 하면 될 일이니까.




---------(한 줄 요약)

한 두 지역 지도만 베껴 그리다 보면 삼라만상이 하얀 종이 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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