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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14. 2023

주전과 비주전 사이

[동네 여행자] 14

산책로에 새로 생긴 벤치들이 주르륵 놓여 있다. 이중에는 흔들의자처럼 흔들리는 벤치도 몇 개 있다. 스윙 체어다. 항상 그 벤치에 사람들은 먼저 앉는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흔들 흔들. 스윙체어에 앉은 남녀노소 거의 모두. 그런데 공통점은 흔들흔들 벤치를 움직이는 이들 표정이 하나같이 밝다. 신나있다. 평온하다. 엄마를 생각하는걸까. 아가였던 자기의 기억을 기분좋게 더듬는 걸까. 그렇게 그 앞을 지나쳐 걷다가 아내랑 우리팀 이야기를 했다. 야구팀. 29년만에 일찌감치 경우의 수 뭐 이런거 없이 1위를 확정했다. 이제 올 시즌도 팀당 서너 게임 정도만 남았다. 일년 내내 같은 것을 반복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 또 그렇게 살지 않는 우리도 별로 없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또 그렇게 다 해낸다, 는 생각이 벤치앞을 지나치는데 훅 올라와 몇십년을 거슬러 올라가 버렸다 .   


나는 시골 초등학교 3년간 학교 대표 운동선수였다. 발탁(?)된 이유는 또래보다 키 가 컸다는 이유 하나뿐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키가 지금 키여서 남매들한테 타박을 가끔 받지만. 태어나 12년 동안 큰 키에서 40여년 동안 15cm 올라 간 게 다니까. 초등학교 4학년. 처음 시작은 핸드볼. 어떤 종목인지 알리가 없었다. 감독이 선정한 나름 주전이었다. 점점이 떠오르는 어렴풋한 기억에 어느 대회 두, 세번째 경기쯤. 앞 경기를 이기고 올라 간 다음 상대의 골기퍼. 골대를 가득 채운듯한 덩치 큰 또래였다. 내가 던지는 공을 죄다 막아냈고, 경기장 밖 감독의 고함은 욕설 수준으로 바뀌고 있었던. 그렇게 일년 정도 쓰이다(?) 학년이 바뀌었고. 5학년때 농구부에 들었다. 아니, 들어가 있었다.


내가 찾아 간 기억은 없다. 그리고 흙바람 날리는 농구코트 옆 건물에서 엄마가 다른 아줌마들이랑 자주 밥을, 간식을 만들어 날랐던 기억 역시 점점이. 그러다 6학년 여름 방학이 되기 전에 다리에 큰 수술을 하면서 멈췄다. 그리고 이런 저런 공부(?)를 해야만 하는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때는 내내 체육대회를 준비하면서 배구에 한참 빠져 있었다. 아마 지금 근무하는 학교처럼 운동장 하나로 중,고 두 학교가 쓰는 이유때문이었지 싶다. 거의 매번 운동장을 장악하고 축구를 즐기던 고등학생들을 피하기 위한 종목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축구는 고등학교때부터 군대까지. 축구만큼 가성비 좋은 종목도 없다. 공 하나에 수십명이 특별한 장비없이 할 수 있으니, 그래서 남고에서 남자들만 있는 당시의 군대에서 축구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지 싶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축구를 하면서 처음으로 팀워크의 가치를 느꼈던 것 같다. 중언부언 할 필요도 없다.


각자의 포지션에서 공의 움직임에 초집중에서 서로 부르고 불리면서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여기에는 벤치에 앉아서 대기하는 팀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라운드와 벤치를 결정하는 건 순전히 감독 몫이다. 항상 감독의 머리에는 주전과 비주전이 그룹화되어 있다. 하지만 선수의 평소 실력은 물론 개인사, 훈련 과정, 몸과 특히 심리 상태, 무엇보다 경기 전날, 당일날의 컨디션을 가지고 판단하는 주전, 비주전의 경계에 있는 선수들도 꽤나 있기 마련이다. 야구는 대학생이 되면서 만난 인연 덕에, 결혼 덕에, 남매 덕에 더욱 사브작 거리면서 즐기는 종목중 하나가 되었다. 핸드볼, 농구, 축구처럼 직접 하는 것보다 제2의 고향같은 연고지 팀을 마음으로 응원하는 정도다. 특히, 아빠 덕에 모태야구가 된 남매들이 어릴 적 선수마다의 응원가와 응원 동작을 따라 하면서 우리팀, 우리팀 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더 짙어졌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도 더 한팀이 되어 간다는 위로는 덤이었다.   


1982년에 6개팀당 80경기를 하던 우리나라 야구가 2023년 올해는 10개팀당 144경기를 하는 규모로 커졌다. 한 게임당 평균 3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러는 사이 감독은 선수들의 컨디션을 계속 파악하면서 벤치와 주전을 구분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렇게 144경기를 운영해야 한다. 야구선수는 대부분 고졸이어야 한다. 그래야 졸업과 동시에 프로팀에 선택을 받았다는 의미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건 첫번째 기회를 놓쳐다는 의미다. 나의 모교에도 전국적인 야구부가 있다. 물론 내가 고등학생때는 그렇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키는 신생아닌 신생 야구팀이 되었다. 내가 등교부터 야자까지 하는 동안 그 선수들은 흙바닥에서 달리고 치고 잡고 던지고를 하루 종일 반복한다. 그런데 그 선수들에게 야구는 선진국 아이들처럼 취미가 아니다. 우리나라 고교야구는 대학 진학 아니, 프로팀으로의 진출에 사활이 걸린 엘리트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야구는 보통 내가 핸드볼을 시작한 나이때 정도부터 시작한다. 리틀 야구로. 그렇게 최소 8, 9년을 야구만한 고교 야구 선수들은 3000여명 가까이 된다. 이중에서 매년 110명 정도만 프로의 선택을 받는데, 실제 주전급 선수로 뛰는 정도는 이중에서도 10%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10대를 몽땅 뒷받친 부모들은 물론 본인들은 잊혀 진다. 아니, 알려진 적이 없다. 지인의 지인의 지인 쯤으로 해두자. 지금 모프로팀에서 주전을 뛰고 있는 선수의 경우, 외삼촌, 고모, 이모 할꺼 없이 위기(?)때마다 십시일반으로 운동하는 비용을 온 가족이 모아 투자(!)했다. 그 비용만 몇 억이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지금 그 선수는 주전급으로 성장했고, 다른팀으로 옮기면서 거기에 버금하는 이적비용을 기록했다. 남의 가족이야기지만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인생은 이 선수처럼 홈런이 아닌 건 조금만 살아보면 몸으로 느낀다. 이 선수도 서른, 마흔 이후의 삶까지 보장된 건 아니다. 보장된 인생, 그런 건 0.0000000% 정도의 지구인 정도에 속해야 하지 싶다. 물론 이것도 금전적인 보장만. 야구만 놓고 봐도 그렇다. 개인 선수 한명만 들여다 봐도 그렇다. 알아서 몸을 만들고, 그 몸으로 단단한 마음을 만들고 항상 대기다. 그렇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홈런, 3루타 같은 장타 다 좋지만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볼을 잘 골라 안타없이 살아나가는 볼넷을 맞이하기도 쉽지 않다. 부상을 당하지 않으면서 내내. 아시안 게임이 끝난 뒤 야구를 포함한 여러 종목에서 기존의 규정에 군 면제가 된 선수들을 갈라치기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실제 결승에서 주전으로 뛴 선수들과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벤치에만 있었던 선수 사이를.


전국민의, 세계인의 화려한 구경꺼리로 만들어 놓고 잘못 되면 개인의 무능으로 치부하는 시스템은 총성없이, 미사일도 쏘지 않지만 여러 사람을 죽이는 전장이다. 엘리트만 주목받는 시스템을 강요하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서 제거하게 만드는 위험한 사회를 구조화시킬 수 있다. 주전도 벤치도 다 한 팀이다. 어느 인생도 주전이었다 벤치였다 한다. 하지만 한참 뒤 돌아보면 벤치 인생이 더 좋았던 적도, 주전 인생때 힘들었던 때도. 그 사이의 삶이 더 화려했을 때도 있다. 허공을 가르고 헛스윙만 한 날이 더 많다. 그래도 어떤 때이건 다 내 인생일 뿐이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쉽지 않은 인생이다. 자꾸 소수만 주목해 주고, 가르려 하지 말자. 천박해지지 말자. 우리 서로 같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나 저나 내 인생의 타율은 몇할 정도나 될지는 시즌이 다 끝나봐야 아는 거다.



-----------(한 줄 요약)

언제나 주전 선수로 뛰는 인생은 드물다. 하지만 기회를 기다리느라 몸과 마음을 만드는 그 순간들은 언제나 주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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