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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17. 2023

코털을 건든 낙엽

[동네 여행자] 15

7시가 조금 안되어 집을 나섭니다.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서 몇 분. 그게 나의 아침 출근길입니다. 몇 분 뒤 이내 차를 차고 사십여분을 달려갑니다. 그리고 지상 주차장에서 걸어서 다시 몇 분. 그렇게 매일 아침, 출근길이 마무리됩니다. 사회생활 시작하고 삼십 대 초중반까지. 출퇴근 시간이 하루 네댓 시간이 넘었습니다. 한 달 기름값이 월급의 3분의 1 가까이 되었던 때도 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사십 대 이후의 출퇴근, 특히 요즘의 출근길은 그저 행복할 따름입니다.



어제 아침. 1층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코털이 화들짝 하더군요. 올 들어 처음입니다. 그제야 그 존재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언제나 내 몸을 위해, 나를 위해 열일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아, 물론 몇 해 전부터는 없던 비염도 생기면서 예전보다는 아주 자주 더 매만지게 되긴 합니다. 내 몸으로 들어오는 걸 걸러 주고, 내 몸에서 빠져나가려는 걸 붙잡아 주고. 내 몸이 바깥과 통하는 통로 중에 코털만큼 들고 나는 것들을 다 관여하는 몇 안 되는 기관입니다. 황사도, 비염도, 감기도 여기서 시작하고 이곳에서 끝나니까요. 시작과 끝을 동시에 조절하는 1cm 남짓한 우리 몸의 공기청정기인 셈입니다.



오늘도 훌쩍이면서 출근을 하다 보면, 어제 처음 목도리를 걸치고 퇴근 후 운이 좋게 산책을 하다 보면 코털의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면서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게 낙엽입니다. 발걸음마다 일부러 피하지 않으면 산책로에서는 어김없이 밟히는. 그렇게 모든 사람이 지워지듯 모든 잎들은 낙엽이 되는가 봅니다. 푸른 창공을 향해 끊임없이 뛰어오를 듯 온몸에 힘을 줄 때도, 뜨거운 태양에 주눅 들어 쳐졌을 때도, 밤샘 비바람에 온몸을 떨며 이겨내려 했을 때도, 기분 좋은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며 손을 잡고 사랑을 나눴을 때를 모두 고스란히 간직 한 채.



낙엽 색깔이 얼록하게 진할수록 아픔과 아쉬움 기쁨과 행복이 짙게 베어 있는 게 분명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낙엽들은 밟히고 쓸리고 나무밑동에 쌓이지만, 그게 또 다른 시작이라는 건 세월이, 세상이 알려주는 지혜입니다. 자신을 흔들고 떨구면서 새로운 살궁리를 하는 실천적인 생명체. 다시 겨우내 도톰한 재료가 되어 자신의 고향인 흙과 자신의 정신체는 나무를 살리는 헌신. 다시 뜨거울 태양과 더 거세질 비바람을, 더욱 한가로운 여유를 누리기 위한 시작을 일찌감치 하는 위대한 실천. 들어오는 게 줄면 나가는 걸 줄여야 한다는 걸 말로만 실천하는 나보다 백배는 낫지 싶습니다.



그런데 코털과 낙엽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코털과 낙엽은 은근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떨때는 하루 종일 그 가느다란 하나의 코털에 집착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 가끔 엄청난 희열(?)에 벅차오르게 해주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 자그마한 것 덕분에. 낙엽도 마찬가지입니다. 낙엽이라고 다 같은 낙엽이 아냐를 속으로 외치면서 '올해의 낙엽'을 찾아 카메라를 들고 온 동네를 걸어다닙니다. 이 맘때만 되면 나오는. 올해는 아직 선정을 못했네요. 혹시 산책을 한번이라도 더 나가야 한다고 내 마음이 내 몸한테 거는 촤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쨍한 코털 덕분에, 헌신적인 낙엽 덕분에 이번주에는 꼭 우리 집 안에서 봄여름과 가을겨울을 체인지해야겠습니다. 이불도 좀 꺼내 빨고, 장롱에서 옷장 속 계절도 좀 뒤바꿔보고.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하겠지 하겠지 하는 모습. 코털만도 낙엽의 10분의 1만도 못한 게으름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에, 쓸모없는 몸짓에 아까운 시간, 더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을 쓱쓱 지워버리는 걸 코털조차도, 낙엽은 당연히 다 알고 있겠지요. 끝날 때까지 끝은 없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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