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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18. 2023

누룽지 찬가

[ㅔ상의 모든 물견] 7



[세상의 모드 물견] 시리즈 일곱 번째. 오늘 물견은 에어프라이기(이하 에프)와 프라이팬입니다. 주방에서 늘 쓰는 것들이지요. 하지만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에프보다는 프라이팬이 더 익숙합니다. 13년 자취 경력 덕분이겠다 싶습니다. 프라이팬 두 개, 아니 하나면 끝장입니다. 김치 송송 썰어서 물기 쫘악 뺀 뒤, 그냥 식용유에 달달 볶아서 김치 두부. 고슬고슬하게 방금 한 흰쌀밥에 바로 날계란 투하에서, 그냥 식용유에 달달 볶은 뒤 고춧가루에 살짝 무친 꼬들 단무지를 송송 썰어 계란 볶은밥. 큼큼하게 막 쉬려고 하는 찬밥을 흐르는 찬물에 씻어 물기 쪼옥 뺀 후, 쓱쓱 기름 닦아낸 팬 위에 최대한 얇게 얇게 펼쳐서 은근한 불로 만들어 먹은 누룽지. 


마이야르 반응이 도가 넘치는 노릇노릇한 누룽지를 두고두고 밥처럼, 간식처럼, 과자처럼 먹을 수 있지요. 비닐봉지 안에 넣어서 설탕 툭툭 뿌려 흔들흔들. 일을 하면서도, 밥을 준비하면서도 입속에서 꼬드득 오드득. 기분까지 좋아지는 간식입니다. 그래서 그 추억을 살려 지난 일요일 아침.  이른 아침이라 아직 다들 잠들어 있는 동안. 누룽지 만들기에 도전해 봤습니다. 밥통에 있던 찬밥이 꽤나 많더군요. 기억처럼 자연스레 가장 커다란 팬 - 집에는 서너 개의 용도별 팬이 있습니다. 기름용이 아닌 가장 큰 팬 - 위에 밥을 쫘악 펼쳤습니다. 한가득. 막 딱딱해지려는 찬밥에 물도 충분히 뿌리면서. 


생각보다 밥 양식 많더군요. 그래서 양쪽(?)으로 나눠해야겠다 하면서 다른 팬 하나를 찾는 눈에 에프가 들어왔습니다. 어, 에프로 동시에 해볼까. 시작은 분명 찬밥이 많아서였는데, 다들 잠이 깨기 전에 누룽지를 얼른 만들어 놓으려 한 거였는데. 과정은 에프와 팬의 대결 아닌 대결이 되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혼자만의 즐거운 비교 실험. 겉으로는 은근히 고향(?) 같은 팬에게 기대를 걸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에프의 강력(!)한 성능에 마음이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네요. 


일단, 찬밥을 넓게 펼친 팬은 가열 온도를 3도로 20분을 예약시간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에프는 180도에 20분으로. 그리고는 물 한잔을 먹고 모닝커피를 내렸습니다. 가끔 딱딱 거릴 뿐 조용한 팬에 비해 에프는 뭔가 대단한 걸 한다고 자랑하듯 웅, 윙 요란합니다. 20분 뒤. 팬 위에 있던 찬밥은 끝부분만 살짝 마이야르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에프 안에 넣은 찬밥은 군데군데 노릇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눌러본 결과. 에프가 훨씬 더 물기를 머금고 있더군요. 일부러 뚜껑을 씌우지 않은 팬 위 찬밥 수분은 많이 날아간 것에 비하면. 



그런 과정을 두 번 더 반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에프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네요. 싱겁게. 앞으로도 누룽지 만들기는 에프에게 양보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인 단점은 전기를 많이 쓴다는 것이지만요. 이번에 누룽지를 만들어 보면서 알았네요. 에프의 기본 온도가 왜 180도로 설정이 되어 있는지. 그 온도에서 마이야르 반응이 가장 잘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00도가 넘어가면 마이야르는 멈추게 되고 캐러멜라이징을 거쳐 타버리는 단계로 훅 넘어간다네요. 


지금도 오며 가며 담아 놓은 누룽지를 한 개씩 한 개씩 깨물어 오물거려 봅니다. 뇌가 흔들릴 만큼 오드득 거리는 소리와 씹는 행위가 반복되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고 보니 누룽지를 깨물어 먹을 때는 심리적 상태는 꽤나 유쾌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거나 예민해 있는 상태에서 누룽지를 먹어 본 기억이 전혀 없다는. 선택적 기억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랬구나 싶어 집니다. 누룽지를 기분 좋을 때 찾게 되는, 그래서 더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수리수리 마수리, 주전부리였나 봅니다. 



180도에서 20분. 세 번째 세팅한 에프가 휭, 웅 하면서 열 일하는 동안 잠깐 읽던 글을 마저 읽으려 발코니로 옮겼습니다. 일요일 아침. 노릇한 냄새를 맡고 일어난 아내가 그 사이 끝난 세 번째 에프에서 이렇게 꺼내어 과자를 만들어 놨습니다. 물도 먹지 않은 채 오드득거리면서. 그런데 절반 정도를 이미 물에 넣어 끓이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누룽지 먹고 싶다고 했던 따님을 먹인다고. 자취할 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에프에 나를 거쳐간 수많은 팬들이 단박에 손을 들어 버렸네요.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후다닥 성능 좋은 에프보다는 은근히, 기다리면서 자주 눈길을, 관심을 둬야 했던 팬이 더 나 같기는 합니다. 


누룽지는 정말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누룽지만큼 세대 간을 이어주는 끈 같은 먹거리는 없지 싶습니다. 아재의 음식이라고 라테 때만 먹었던 거라고 서로 구분하지 않는. 그 냄새에 소리에 색깔에 누구나 모여드는. 앞으로 전기를 덜 쓰면서 성능은 더 좋아진 에프가 나오겠지요. 그래도 저래도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멋지고 화려한 음식보다 누룽지는 따님의 따님, 그 따님의 따님까지 이어질게 분명하지 싶어 집니다. 오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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