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우스] 20
자그마한 골목도, 잘 다듬어진 산책로도, 곧고 길게 뻗은 도로도 결국에는 다 이어집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그 길을 따라 걷고 달립니다. 그러다 보면 눈에는 항상 나무, 꽃, 풀 들이 따라 들어옵니다. 예전부터 들어왔을 겁니다. 다만 내 마음에 남아 있지 않았을 뿐이겠지요.
여기가 길이다, 산책로다, 우리 단지다, 우리 동네 화단이다, 내가 자주 가는 뒷산이다 알려주는 나무들, 꽃들, 풀들 속에 봄여름가을겨울이 이미 함께 있었던 겁니다. 은행나무는 가을에 은행을 떨구고, 벚나무도 이팝나무도 봄에 만개할 뿐이었네요. 단풍나무는 이미 봄부터 단풍이었던 겁니다.
어제 퇴근길. 이제는 훅하고 어두워집니다. 바로 그 직전. 차를 주차하고 집으로 올라가는 화단 사이 좁은 통로. 여기가 화단이에요 하면서 동그랗게 둘러 있는 사철나무 사이에 연보라색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세 걸음이면 지나칠 짧은 화단 안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올해도 @@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온 삼 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세 걸음 대신 잠깐 쪼그려 앉았습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아내에게 보냈습니다. 링크도 같이. 그 덕에 어젯밤에는 나 혼자가 아닌 우리 둘이 잠들기 전까지 계속 그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나의 열 살 때. 뜻도 모르게 따라 불렀던 그 동요를. 가사를 찾아보니 앞 두 소절만 입에 달라붙습니다. 이 노래가 이렇게 슬펐나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 대부분은 '계획적'으로 형성된 도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92%가 넘게 도시 지역에 거주하니까 이 '계획'에 영향을 받아 살고 있다는 겁니다. 자그마한 화단부터 크고 넓은 대공원까지. 이 말은 우리는 그저 오감으로 잘 즐길 준비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사시사철 내내.
자그마한 풀 한 포기, 아담한 꽃 한 송이, 크고 작은 가로수는 모두 미리, 많이 살아 본 누군가의 조언이었던 겁니다. 벚나무 사이사이에 단풍나무를 심어 가을이어도 봄을 잊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무더위, 폭풍우, 폭설, 한파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인생 선배들의 정성 가득한 사랑이었습니다.
봄에도 가을을, 여름에 겨울을, 가을에 봄을, 겨울에 봄여름가을을 다 만날 수 있었던 겁니다. 조금만 관심을 두면, 찾아보면 우리 늘 그렇게. 안 보면, 못 느끼면 나만 손해였던 겁니다. 잘 먹고 잘 나갔다 잘 돌아오면서 별일 없는 그런 하루 안에 사계절이 다 있었던 겁니다. 별 일 없는 밋밋한 것 같은 하루가 최고라는 것을.
아무리 짧아도, 엄청나게 길어도 우리 인생은 월화수목금토일중 하루입니다. 먹고 사느라 정신없는 그 하루 동안에도 우리는 같이 '휴운산' 정상 정복을 갈망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힘들어도 휴식. 운동. 산책. 그런데 주변을 돌아 보면 다 '계획'에 이미 반영되어 있었던 겁니다.
음악 한 소절, 짧은 동네 한바퀴 걷기, 이름 모를 풀꽃들, 비바람을 막아주는 큰 가로수 아래. 마음은 물론 몸나이도 어릴때일수록 '휴운산' 정상 정복 방법을 빨리 깨닫는 사람이 더 많이, 더 길게 아싸라비야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겁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비입니다. 그 속에서 과꽃의 꽃말처럼 '믿음직한 사랑'을 더 많이 나눌 수 있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