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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20. 2023

실외 할게요, 구구굽니다.

[세상의 모든 물견] 8



나와 식구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곳. 비바람을 막아주고 강한 햇빛과 더 강한 시선을 막아주는 곳. 그렇게 편안한 내 세상인 곳. 나의 본성과 이성, 야성, 천성. 모든 것들을 비교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조언하지 않는 곳. 토닥이고 위로해주는 곳.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 잘 나갔다 잘 들어오는 지를 매 순간, 매일, 매 계절마다 서로 체크하고 챙겨주느라 정신이 없는 곳. 아파도 괜찮고 울어도 괜찮고 밤새 기뻐해도 괜찮고 다 그냥 괜찮은 곳.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생각과 꺼리를 펼쳐 놓을 수 있는 곳. 가끔은 그 속에 있어도 거기에 가고 싶은 곳. 바로 집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결과론적인 집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런 집을 보금자리로 만드는 반복되는 '일'. 집 청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웬만해선 집 청소, 티가 잘 나지 않습니다. 럭셔리한 호텔처럼 매일 누군가가 대신해주는, 드라마틱한 집이 아닌 이상에는 그렇지 싶습니다. 2020년 현재 2,093만 일반 가구 중 52%인 1,078만 가구가 '아파트'에 거주합니다. 우리 집도 그 52% 속합니다. 그 비슷한 구조의 아파트. 그 안에서 두 곳이 유독 쉽게 신경 쓸 수 없어서, 써도 티가 안나는 곳입니다. 한 곳은 샤워부스 내 배수구. 두 번째가 실외기 발코니.


실외기. 차고 뜨거운 바람을 만드는데 필수인 물견입니다. 이번 여름을 지나면서 근처로 이사 온 40년 지기 친구네 덕에 실외기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듀얼에어컨이라. 그래서 가뜩이나 좁은 실외기 발코니에 위아래 이층으로 실외기를 올려놓았네요. 그런데 이곳은 물청소를 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먼지만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새들은 앉았다 항문으로 배설물을 버리는 추진력으로 다시 날아오르는가 봅니다. 그래서 실외기 발코니는 일부러 열어 보지 않으면 금방... 이번에는 실외기를 설치하고 그 위에 케이블 타이 가장 큰 것을 난간에 묶어 바람이 흔들리게 만들어 놨습니다. 아주 촘촘히. 그리고 그 위에서 창틀로 그물까지 걸쳐 놨지요.


실외기를 난간에 흔들거리는 물체가 있고, 실외기 위에 온통 그물망인 거죠. 봄여름에 정말 효과 만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2주 전부터 다시 배설물이 쌓이기 시작하더군요. 이 동네 새들이 이제 우리 집 상황을 파악한 듯합니다. 주말에 창밖으로 가끔 보면 그렇게 흔들리는 대왕 케이블 타이 옆에 거의 엉덩이까지 붙이고 앉아서 일광욕을 해요. 참 얘들도 우리만큼 적응력이 상당합니다. 여하튼 이렇게 공생을 하려면 어쩔 수 없지요. 어차피 서로에게 보금자리인 거니까요. 그래서 비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한 3주를. 그냥 비 말고 폭우처럼 마구 쏟아지는 그런 날을.


그날이 바로 어제 새벽이었네요. 글을 읽고 있는데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가 배수구를 갑자기 빠르고 크게 때렸습니다. 아싸라비야였습니다. 얼른 아내가 자고 있는 발코니 옆 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자기야. 오늘이야, 하고. 덕분에 아내는 꿀잠을 십분 정도 덜 자야 했지만 표정은 매우 온화하고 단호했습니다. 실외기 청소해야지, 하고 있었습니다. 끝이 철사로 된 긴 장대솔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실외기 발코니 창문을 열었습니다. 창문밖 저 넓은 공간은 검은색 바다 같았습니다. 멀리서 번쩍이는 붉은색 신호등은 꼭 등대불빛 같았고. 그런데 고개를 살짝 내려다보니 그 아래는 아수라가 따로 없었네요. 더러운 아수라.


어둑해서 잘 보이질 않아 휴대폰 플래시를 켰습니다. 언제 왔는지 옆에는 아내가 같이 서 있었습니다. 윽, 억, 뭐야 이거. 아휴. 커다란 실외기가 두 개 겹쳐 올려진 주변 발코니 바닥. 아래 실외기를 놓고 남는 공간은 아내가 잠드는 방 외벽 사이에 한 10cm입니다. 그 공간에 빙 둘러 수북하게 검은흙이 쌓여 있었습니다. 원래는 진회색의 콘크리트 색깔이어야 하는데요. 검은흙 사이사이에 새의 깃털들과 짧은 나뭇가지들이 뒤섞어 있더군요. 아, 그런데 그 좁은 틈 사이에. 앞 뒤로 나란히 두 마리의 비둘기가 있었습니다, 이런.



새벽녘에 갑작스러운 비를 피한 곳이 우리 집 실외기와 외벽 사이 그 공간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휴대폰 플래시 불빛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출근 준비를 하러 간 아내를 다급하게 불러 보라고 했습니다. 예상대로 아내는 대뜸 그럽니다. 어휴, 안돼. 오늘 청소 못하겠다. 얘들 어쩌. 하면서 다시 살아집니다. 조심하라고 두 번이나 당부하면서. 긴 철사솔로 난간에 굳은 배설물을 조금 털어만 내야지 하고 살살 몇 번을 문질렀습니다. 그러는 사이 빗줄기는 훨씬 더 굵어졌습니다. 덕분에 배설물이 잘 흘러내려 지워지고 있었습니다. 아, 그때. 이 녀석들이 살살 살살 앞뒤로 걷기 시작하더군요.


앞 원안에 있던 둘기 1은 슬금슬금 앞으로 뒷 원안에 있던 둘기 2는 몸을 휙 돌려 그 좁은 배관 아래 틈으로 되돌아 기어가더군요. 그런데 그 슬금슬금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내려다보다 문 닫고 가나 안 가나 재는 것처럼. 전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가는 척하려다 다시 눌러앉으려는 모습처럼. 하지만 빗물에 흘러내리다 멈춘 배설물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네요. 그렇게 몇 번 솔질을 하는 사이 그제야 빗속으로 푸드덕하고 날아들어 갔습니다. 마치 높은 점프대에서 뛰어내리듯이. 그래서 그 틈 사이에 있는 검은흙들을 간단하게 아래로 쓸어내리면 되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검은흙은 덩어리였습니다. 배설물과 깃털, 나뭇가지가 합체된. 그냥 철사솔 쓱쓱 하는 힘으로는 쓸리지 않았습니다. 흘러드는 빗물에 물을 더 받아 조금씩 조금씩 붓고 나서야 서서히 그 덩어리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삼십 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실외기 자체에는 또 물을 마구마구 부을 수 없어서. 출근 시간이 늦어 깜빡했네요. 청소 후 사진을. 그래도 어제 하루 종일, 아니 지금도 커다란 숙제 하나 해 낸 것처럼 기분이 괜찮습니다. 가을비가 한번 더 세차게 내리면 겨울이 되기 전 두 번째 청소를 한번 더 해야겠습니다. 그물망도 다시 손을 봐야 하고.


서울올림픽 때 성화대 주변으로 날아오르던 비둘기, 가 우리 거의 전 국민의 비둘기에 대한 추억의 시작이었을 겁니다. 나라가 평화의 상징이라고 만들어 준 그 비둘기. 올림픽 이후 20년이 조금 넘어 다시 나라에 의해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20년이 흘렀네요. 그동안 아파트는 도심에서 외곽으로 외곽에서 산을 타고 더 높게 높게 올라갔습니다. 그 덕(?)에 도심을 떠도는 50만 마리가 넘는 비둘기를 포함한 수많은 조류들의 보금자리는 실외기 발코니까지 포함되어야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공생을 해야겠지요. 서로 건강하게. 도시에서, 우리 보금자리에서 사는 게 이제는 필수가 되어버린 실외기. 청소를 자주 하는 수밖에 없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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