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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21. 2023

어른이 왜 어른인지 아는 어른과 모르는 어른이

[동네 여행가] 16

열여덟 따님이 미간을 몇 번 찡그리다 둘 다 이내 모니터를 바라보며 바로 앉았다. 담당의는 책상 아래에 있는 자신의 왼쪽 무릎께에서 흰 종이 한 장을 꺼내 모니터 아래 책상 위에 올렸다. 자주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무릎 위로 살짝 수북하게 쌓인 하얀 종이가 보였다. 그 종이 위에 우리 둘이 알아보기 쉽게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게 근육이고 이게 지방층이고 이게 피부이고 모낭이고. 우선은 종양이 근육에서 떨어져 있어 다행이라고 한다.


마음이 다급해져 담당의 설명 중간에 종양이 맞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맞다고 한다. 아, 하는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금세 고쳐 다시 말해 준다. 눈으로 보기에는 모양이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이 판단하기에는 양성 종양이라고. 내 왼손을 잡고 있던 따님이 손에 힘을 준다. 그래도 걱정이 싹 가시지 않아 또 물었다. 동네 피부과에서 분명 염증은 아니고, 지방종, 모낭도 아니고 악성 종양이라고 했다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아마 내가 엄한 사람한테 따지듯 물었을 거다. 딴 데서 뺨 맞고 와서 화풀이하려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젊은 담당의는 옅은 미소를 짓기만 했다. 추가 검사가 필요하지 않는지, 다른 조치는 필요 없는지 자꾸 묻고 또 물었다. 그럴 때마다 담당의는 묵묵히 내 말을 다 들어줬다. 중간에 끊지 않고. 그리고는 그런다. 조직 검사라는 게 어차피 수술을 통해 환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거꾸로 수술을 하고 들어낸 환부를 가지고 조직 검사를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일단, 자신이 보기에는 그런 생각이 든다고. 양성 종양이고, 근육층과 꽤 떨어져 있어 깊이도 좋다고, 별 문제없을 것 같다고.


다리에서 한없이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따님이 혼자 피부과를 갔을 때 진료의가 염증이 아니라 악성 종양이라고 두 번이나 말을 하면서 전원서를 써주었다고 했더니 담당의가 입술을 꽈악 다무는 게 보인다. 애써 옅은 미소를 지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응급 수술 날짜로 잡힌 게 지난주 수요일. 그리고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온 게 어제였다. 딱 열흘이었다. 하지만 열 번의 하루가 한 달 같았다. 집에서도 사무실에서도 일에 손에 잡히지 않고. 글이 읽히지 않고. 걸어도 숨이 몰아 쉬어지고.   


따님 앞에서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아내와 내가 연기했지만. 표정을 숨기는 연기는 잘하지 못하는 편이라 둘 다. 하지만 3주 가까이하던 공부를 쉬면서도 마음이 더 무겁고 불안했던 건 따님이 서너 배는 더 했을 거다. 괜찮다고 서로 위로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닭발을 먹으면서 잊으라고 했지만. 아직 10대니까. 오십이 넘은 우리 마음도 폭우 속 가랑잎인데. 하루가 한 달 같은 그 열 번의 마음을 셋다 모아 어제 오후. D병원 그 전문의 진료실 앞에서 한 시간가량을 기다렸다. 아내와 따님이 서로 기대어 있는 동안 병원 중앙홀을 끝에서 끝까지 계속 걸었다.

 

그러면서 온 우주의 기운이 이 병원 저 천장. 우리 셋의 머리 위로 마구 쏟아지기를 눈뜨고 기도했다. 그래도 만약에,라는 단어가 불쑥불쑥 올려왔다. 누르면 누를수록 다음번에는 더 빠르고 더 높게. 그러는 사이 엄청나게 많은 환자, 환자 가족들이 참 다양한 표정으로 내 앞뒤로 오고 갔다. 병원에 가면 그런 걸 많이 느낀다. 문 하나 차이로 참 많은 것들이 단순하지만 명확하게 갈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별일 없는, 밋밋한 일상이 가장 최고의 선물이라는 선지식의 체험장이라는 것을.


그때 따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다음 순서라고. 진료실은 지난주처럼 내가 들어가기로 했다. 다만, 아내는 들어가서 듣고 바로 톡하나만 달라고, 따님한테 당부를 했다. 열흘 만에 만난 담당의. 표정부터 너무 밝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디 보자, 어디 보자를 내뱉으며 모니터에서 따님을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아 여기다, 하면서 신나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떤 표정이었을지 궁금했다. 어, 아, 네. 걱정 마세요. 조직 검사에서 아무런 이상 결과가 없었네요. 없습니다.  


앉아 있던 따님이 날 한번 올려다봤다. 나도 따님을 내려다봤다. 마스크 위로 눈빛이 촉촉해져 있었다. 이내 따님은 톡을 했다. 아내한테 하는 것 같았다. 수술한 상처를 꼼꼼히 보면서 등이지만 수술한 자국에 흉이 덜 생기게 연고 하나를 처방해 준다고 했다. 자그마한 연고가 4만 원이 넘는데, 보험이 되질 않는데, 이러시면서. 또 한 번 세심하다고 느꼈다. 그 세심함이 매우 신중하게 다가왔다. 나를, 우리를 항상 염두에 두면서 한마디 한마디 골라서 쓰는 것처럼.

 

내가 아빠가 된  알게된 친구같은 동갑내기 내과의. 아내의 사촌 동생인 내과의. 나의 정기 검진 주치의. 그리고 이번 일에서 만난 D병원 따님 담당의의 공통점은 딱 하나다. 아주 신중하다. 확신하지 않는다. 자신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신뢰감을 준다. 왜 의사가 되려고 하니 하고 의대를 다니는 누나처럼 의대를 가겠다던 우리 반 00 이한테 학기 초 상담 중에 물었다. 역시나 똑 부러지게 이런저런 대답을 잘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면접용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다음은 이렇게 물었다. 그럼, 어떤 의사가 되려고 하니, 하고.


금방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라고 한참 있다 대답을 했다. 그런데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특히, 사람을 상대로 하는, 그리고 그 상대가 어릴수록 그 어른은 신중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까 어른이다. 미성년자가 혼자 병원에 갔는데, 악성 종양이라는 말을 그것도 두 번이나 아이 앞에서 내뱉었어야 할까. 그리고 그게 확신에 찼다면, 미성년자 기록에 항상 따라다니는 보호자 정보로 연락을 왜 해주지 못했을까.


진료를 다 마치고 아 이제 월요일부터는 다시 공부하러 간다, 하면서 신나 하는 - 물론 공부가 신난 게 아니라 간다가 신났다는 건 우리 둘 다 익히 알고 있지만 - 따님옆에서 아내가 또 숨을 몰아쉰다. 눈가가 촉촉해진다.  한없는 불안이 분노로 바뀌려는 순간이다. 다시 아내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나의 분노를 쓸어내렸다. 우리 뭐 먹을까. 닭발? 하고 둘에게 물었다. 내가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둘이 정말 좋아하는 닭발을 먹는 날은 밋밋한 일상에 매콤한 양념이 필요할 때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나한테 묻고 있었다. 어쩔 거야, 그 의사를. 그 병원을.  


하지만 내 안의 질문에 내가 답하는 데는 미끌거리는 지하주차장에서 몇 걸음 정도면 충분했다. 전화 한 통에 얼른 인정하고 진심 사과할 인성이었으면 따님 앞에서 그렇게 신중하지 못할 수 없었을 거라고. 그러면서 살아가면서도 참 불편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한테, 안 그래도 부족한 내 에너지 쓰지 말고 따님 담당의 같은 의사가, 사람이 더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 에너지를 다 몰아 쓰자고. 옆에서 춤추듯 걷던 따님이 내 속을 드려다 본 듯 그런다. 저 의사 선생님처럼 저렇게 하나씩 하나씩 다 친절하게 묻고 설명해 주니까 진료 지연 시간이 생길 수밖에 없네. 닭발 먹을까?


어제 저녁. 집에 도착해 어둑해진 하늘 아래로 애써 매달려 있던 낙엽들이 마구 떨어졌다. 갑자기 바람이 많이 불어서. 맨 얼굴을 때리는 바람은 완연하게 차가워졌다. 그래도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찬 바람이 4월 하순 봄바람 같았다. 닭발 대신 친구를 만나러, 3주만에 바깥을 나가는 따님의 뒷모습이 너무 행복해보여 더 행복했다. 3주 전, 베트남으로 다시 들어간 아우님이 두고 간 와인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저녁이었다.  



(이 글은  https://brunch.co.kr/@jidam/1301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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