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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18. 2021

오늘만 같거라, 더 많이

  2021년 3월이 다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모여있는 카톡방에 초대된 이튿날 슬그머니 빠져나갔습니다. 오는 건 고사하고,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문자도 카톡도 읽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그저 사진 속에서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일 년 내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합니다. 우울증에 대인기피증이 심했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전해주는 그 아이에 대한 정보는 이 정도뿐이었습니다. 집을 찾아가려 아이 아빠와 통화를 여러 차례 시도했습니다. 아빠도 역시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나. 카톡을 조금 길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카톡을 보고, 아빠가 나에게 연락해왔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나를 처음으로 찾아온 날, 자퇴원에 사인을 했습니다. 아빠도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아이는 자기 세상으로 사라졌습니다. 한 번도 보지도 못하고.


  그 빈자리에 6월 중순쯤 남자아이가 새로 왔습니다. 열아홉입니다. 열아홉에 고2입니다. 잠깐 동안 학교를 밀어내다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복학 같은 전입입니다. 그 아이가 온다는 전날에 전 미리 움직였습니다. 가장 아늑한 공간 한 곳과 권위적인 한 곳을 빌렸습니다. 앞의 공간은 신관 1층에 있는 카페 같은 사무실입니다. 윤기 나는 진회색 벽이 둘러 있고, 가운데에 기다란 갈색 나무 테이블이 있는, 교실 한 칸 크기의 공간입니다. 올해 개학 전 공사를 해 오픈한 곳입니다. 신입생들 철학 수업을 하시는 주인장님이 입구 쪽에 커피와 차를, 냉장고에 음료와 커피를 가득 넣어주고, 마음껏 이용하라고 하시는 공간입니다. 뒤의 공간은 본관 1층에 있는 상담실입니다. 어느 학교에나 있는, 적응에 힘들어하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곳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무실 안에 작은 공간이 두 곳이 있습니다.




  이 공간들을 빌린 이유는 아이와 진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안정된 분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도 다짐을 할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다음 날 그 아이가 왔습니다. 검은 마스크로 눈밑부터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잘 생긴 얼굴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봤습니다. 생각보다 눈매도 매섭지 않았습니다. 괜한 기우였다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오히려 약간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다시 돌아오려 했는지, 지금 다짐은 어떤지, 어떤 게 힘들고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두 시간 가까이 나눈 대화에서 저의 질문에 언제나 머뭇거리지 않고 준비된 것처럼 금방 답했습니다. 대답은 평범했습니다. 졸업 자체가 목표랍니다. 대학은 가야겠다고요.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아직 구체적인 꿈은 없지만 대학'은' 이었습니다.  그리고 근태(출결상황)가 좋지 않아, 내부 규정 절차상 따라오는 벌칙을 받는 짓은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자신은 남의 인생에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도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그 남안에는 저도 포함된다는 것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스물네 명이 모여서 서너 달을 보냈다면, 그 사람들이 아직 미성년들이라면 더욱, 그곳에는 이미 질서가 만들어져 있을 겁니다. 작은 갈등이 있었어도 일단 봉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서로 신경 안 쓰고, 끼리끼리만 잘 어울리면 문제로 불거지지는 않습니다. 어찌 되었건 표면상으로는 평화가 유지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구성원이 끼어드는 방법은 딱 두 가지입니다. 스스로 뛰어들거나, 누군가가 뛰어들어 주거나.




  저에게 온 지 두어 달이 지나갑니다. 스물네 명에 한 명이 더 늘어났지만, 물과 기름 같습니다. 물론 다른 관계에서도 물과 기름이 있었지만, 독보적인 기름입니다. 스스로 뛰어들 생각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한 살 더 먹은 그 아이를 위해 뛰어들 만한 에너지를 가진 구성원도 딱히 없어 보입니다. 그러는 동안 그 아이는 딱 '걸리지' 않을 정도로 합니다. 오프라인 수업 때는 1분 1초를 따지듯이 나타나고, 자주 아프고, 가끔 사라집니다. 원격수업에서는 수업을 골라하는 것처럼 자주 빠집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에도 두서너번 통화를 해야 합니다. 아침 출근할 때 통화하고, 톡을 합니다. 퇴근할 때 통화하거나 톡을 합니다. 참 다행인 건, 전화는 거의 받습니다. 몇 번은 뚝 끊어진 이후에 '문자를 보내주세요'라고 답이 왔었지만 말입니다. 스물다섯 명은 엊그제 월요일 아침부터 다시 원격수업 중입니다. 아침 조례가 끝난 뒤 그 아이를 포함해서 몇몇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미인정이 몇 개인데 몇 개부터는 뭐를 해야 하고, 몇 개부터는 어디를 가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알렸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온 지 석 달만에 이번 주 내내 35개의 모든 수업에 등장을 했습니다. 중간중간에 조금씩 늦게 들어간 게 몇 개 있긴 했지만, 그것도 스스로 알아서 챙겨 들었습니다. 원격수업임에도 말이지요. 어제 퇴근을 하면서 전화할 때는 똑같은 말을 본인이 먼저 이야기합니다. 스스로가 대단하다면서, 조금 신이 나 있습니다. 맞습니다. 아이 스스로 자신에게 믿음을 갖게 되는 경험이었으니까 신이 날 겁니다. 스스로가 기특할 겁니다.


  '너도 되는 거 봐. 네 스스로에게 신뢰가 생겼지?'라는 질문에 어색한 웃음으로 '흐흐. 그러게요'라고 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조금 과장하면 지구온난화를 한방에 해결한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통화를 끝내려 하는데, '명절 잘 보내세요'라고 말하더군요. 석 달만에 처음입니다. 나에게 인사말을 건넨 게 말입니다. 조금 있으면 한가위입니다. 저는 통화 후 그 아이에게 긍정의 에네르기파를 보냈습니다. '너도 더 많이 오늘만 같거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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