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Dec 14. 2023

누구와 통화하고 싶으세요?

[나명작] 5_연극<비누향기>

이제 막 30대가 된 조카 하라(가명). 1500여 일 만에 한국에 왔다. 간호사를 하다가 날아가 다시 (캐나다) 간호사 시험에 통과한 직후 돌아왔다. 3주 동안 잠깐. 가장 먼저 먹고 싶었던 게 붕어빵이었단다. 집 앞에서 환상적인 맛을 만났다며 그 자리에서 4마리를 먹었단다. 옆에 있던 열여덟 따님이 서른 살 언니의 인증샷을 보냈는데, 그 표정이 천상에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저런 표정이겠다 싶다. 


어제 늦게 한국에 있는 대학 동기들 만나기 투어를 시작하느라 이틀만 자고 나갔다. 주말에 돌아온단다. 그래서 아직 허락을 구하지 않아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다. 서른이지만, 열여덟 따님을 능가하는 텐션을 가지고 있다. 텐션이 낮을 때가 하루 종일 일하다 밤 10시에 퇴근한 사람 같다, 고 따님이 표현할 정도다. 중학생이 되기 전, 되고 나서 잠깐잠깐 우리 집에서 지낼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밝은 텐션이 좋은 아이다. 하라는 그냥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 


중독이 될 수 있는 기호식품 - 담배는 물론 술도 못한다. 콜라도 평생 한번 마셔보지 못했단다. - 을 그 나이 때부터 전혀 하지 않아서 그런가 그 텐션이 여전히 맑기까지 하다. 표정만 봐도 나도 얼른 밝아져야지, 좀 더 맑아져야지 하게 만들어 주는 참 소중한 하라다. 매일 새벽을 열고 나오면 언제나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아내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저께부터는 아내옆에 부스스한 하라도 같이 있다. 


시차 적응이 되질 않아 나의 새벽을 이틀째 아내보다 먼저 (강제로)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그냥 좋다. 새벽부터 밝아지고, 맑아지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하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새벽부터 하게 된다. 하라는 93년생이다. 벌써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도 있고, 이미 솔로를 선언한 친구도 있고, 여전히 간호사를 해내는 친구도 있다면서 이 친구 저 친구 이야기를 고맙게도 나에게 이야기를 다 해준다. 


그러는 중에 하라의 고민이 들렸다. 지금껏 함께 살아온 엄마와 헤어질 결심을 서서히 하고 있는 것. 이제야 엄마를 떠나 혼자서 살아내 보려고 하는 것. 따듯하고 좋아하는 사람들 많은 바닷가 도시에서 벗어나 반년 가까이 눈이 많고, 얼어 있는 곳으로 혼자의 삶을 위해 도전해 볼까를 고민하고 있는 가 보다. 하라랑 친구처럼 지내면서도 지금도 아가, 아가라고 부르는 처형 마음이 벌써부터 걱정(?)이 되긴 된다.  


모든 자식은 부모를 떠난다. 같이 있어도 떠난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지금' 장면의 의미를 설명하고, 공유하고, 공감하는 순간을 많이 만들어어 한다. 이 이야기를 어제, 그제 시차 적응도 안된 부스스한 하라는 나의 새벽으로 들어와 꺼내놓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한국에서도 보다 훨씬 더 신나게 살아 낸 하라도 사람이 참 고팠던 거다.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만나는 이들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93년생 친구들의 가장 큰 고민은 (짐작하듯) 결혼이다. 할까 말까 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는 못한다가 대세란다. 하라도 인정한다. 하라 때까지도 부모는 가난해도 자식은 (대체로) 가난하지 않게 자랐다는 것을. 부족한 티 내지 않으려고 있는 것, 없는 것 끌어 모아 자식을 키워내는 그 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 세대의 버전(?)이 조금은 다른 것 같단다. 


(부모한테) 받은 게 있으나 (결혼을 해서 자식을) 비슷하게라고 키워내야 한다는 세대 간 대물림에 극도로 자신 없어하는 세대란다. 내가 큰 그 정도로도 내 자식한테 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판단을 친구들은 많이 하고 있다고. 표면적으로는 돈이 문제다, 분명. 그런데 이건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데도 공감한다. 그보다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에 대한 이야기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은 자식으로 시작한다. 태어나 보니 누구누구의 아들, 딸이었다. 그 아들, 딸이 부모가 되어 아등바등 평범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게 키워내려 한다. (남들보다) 더 잘 먹이려 한다.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게 하려 한다.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히려 한다. 언제나 남. 들. 보. 다. 더. 더. 더.  그런데 이게 참 인간적이다. 남들만큼은 아니어도,라고 시작하는 부모 되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렇게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열심히 살아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같은 시기, 같은 상황에서 부모와 자식의 (기억 속에 저장된) 장면 장면에 대한 해석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달라지는 장면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따로 살아낸다. 그 자식이 부모(어른)가 되고 나서 더듬는 기억은 부모가 더 나이 든 부모가 된 후에 (운이 좋으면 잘) 충돌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왜곡된 기억과 꽤나 다른 의미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저기서 눈물 훔치며 몰입한 많은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연극 <비누향기>의 모티브는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는 거다. 지금의 내가 삼십 년 전의 아버지 하고 전화 통화를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지금의 내가 십삼 년 전의 아드님님과 만나볼 수 있다면. 맞다. 누군가가 부모는 이런 거야, 어른은 이런 거야를 어디 모아 놓고 설명이라고 미리 좀 해주지 하게 된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억울(?) 한 게 없지는 않으니까. 


이런 쓸데없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는 이유가 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 보니 딱 한 가지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하자고 아등바등했던 그때의, 그 상황의 장면 장면들을 부모와 자식이 비슷한 기억으로 의미로 기억하면 할수록 그 둘의 관계가 훨씬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부모와 관계가 좋은 자식은 자동으로 하라처럼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항상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면서도 밝은 텐션으로 (자기도 지치지 않으면서) 주변까지 맑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자식 참 잘 키웠어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비결(!)은 이미 있었던 거다. 


부모가 묵묵히 일만 하는 건 잘못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이나 해라고 키워서는 위험할지도 모른다. 우리보다 훨씬 더 실패를 딛고 스스로 일어나야 할 상황이 더 많이 펼쳐질 세상이 이미 되어 버렸기 때문에. 사회시스템적인 적절한 패스와 기회 제공이 줄어들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각자의 (전문적이면서도 인간적이기까지 해야만 하는) 능력이 더 또렷하게 대비되는 세상이 이미 펼쳐져 있기 때문에. 우리처럼 뒤로 돌아, 뒤로 돌아해도 가운데 어디쯤 머물러 있으면 먹고는 살았던 세상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할 말 다 하고도 서로 같이 잘 살 수 있는, 능력 있으면서도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지금부터라도) 많이 만들어 줘야지 싶다. 우리가 함께 탄 배가 산으로 가는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를 설명하고, 설명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난파 직전이 아니라 정상 운항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 평범하지만 기쁘고, 행복한 이 상황을. 그런 과정에서 부모한테 보고 배운 걸로 자식은 살아가는 것일 테니까. 


평범하지만 행복해 보인 부모, 어렵지만 용기를 잃지 않는 과정을 몸으로 말로 표현해 준 부모, 자식이지만 사람으로 대해준 부모, 무작정 퍼주지는 못해서 고마웠던 부모, 입보다 눈빛으로 먼저 말을 걸고 기다려준 부모.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자식은 (그런) 부모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지나고 나서 보면 가장 빠른 때였다는 말을 이제라도 실천해야 할 때인가 보다. 나중의 통화보다 지금의 대화를.


연극을 같이 보고 나온 열여덟 따님이 단박에 묻는다. 아빠는 지금 통화를 할 수 있다면 과거의 누구랑 하고 싶어? 글쎄, 아빠는......

작가의 이전글 뜨끈하게 진한 희망을 떠올릴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