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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Dec 17. 2023

사유의 방으로 향하는 길

[일나쓰] 6

지금껏 달려온 내 길에서 빠져나왔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 빠져나오자마자 익숙하지 않은 새 길이 나를 기다렸다. 익숙함은 모든 감각이 경험을 거치면서 고정되어 있는 사실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다시없는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익숙함은 정서적 편안함으로 이어지는 샛길중 하나다. 언제나 머물고 싶어 진다. 하지만 길은 이어져서 길이다. 그중 가장 끝  가장자리 길에 유독 다들 모여들고 있다. 나는 그 길로 끼어들어야 한다.


어느 길이나 앞서 달리는 이는 있다. 하지만 늦게 도착한 비주류가 주류의 흐름 속에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는 않는다. 개인적이고 불편한 선택적 기억은 주류, 비주류로 구분되는 것과는 별개다. 길로 이어지는 길에는 원칙이 있다. 약속이 존재한다. 원칙과 약속을 지키면 함께 달려갈 수 있는 조건이 부여된다. 일단은. 실선은 금지다. 점선은 허용이다. 실선과 점선의 위치가 나의 안에서 바깥인지, 밖에서 안으로인지만 구분하면 된다. 타인에게 방해받고 싶은 타인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모두의 적당한 흐름 속에 자기 목적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기다림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다. 던지는 게 아니라 받는 시간이다. 그러는 사이 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보다 훨씬 더 여유 있게, 부드럽게 아름다운 손을 내민다. 나를 향해 일부러 멈췄다. 천천히 허공으로 내뻗은 손을 흔든다. 힘내, 지금이야, 여기야, 여기. 아주 오래전 얼음배 위에서 함께 입김을 내뱉으며 온몸을 달구던 친구의 손짓 같다. 사람은 손짓 하나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는 사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사유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 근처에 도달할 수 있는 자기 재생력이다. 그 에너지의 절반은 공간이 가져다준다. 은은한 시각, 향긋한 후각, 익숙한 촉각과 같은 감각들이 깨어날 수 있는 익숙한 공간. 우리 집, 내 방, 나만의 아지트. 우리가 어느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가가 사유의 깊이를 결정한다. 중학생 때 헥토파스칼로 처음 인사를 나눴던 파스칼은 이 부분을 꼬집었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를 모른 채 지금 올라서 있는 길 위를 통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자기 삶의 진실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자기 공간에 진득하니 붙어서 자신을 직면하라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자기 감각이 깨어날 수 있는 공간(그는 이 공간을 집이라고 표현한다)에 조용히 머물지 못한다는 단 한 가지 사실에서 시작된다고 단정 짓는다. 사람들이 익숙한 자기 공간에서 진득하게 머무르지 못하는 이유도 단 하나다. 혼자 즐겁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혼자 지내면서 가만히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와 도박, 놀이를 찾아 밖으로 나와 길 위로 모여드는 것이다,라고. 아프다. 나의 역마살이 단칼에 찔린 느낌이다.


삼십 대를 시작하면서 다시 만났던 그의 손짓은 여전히 하찮았다. 말끝마다 궤변이었고, 책장에 쳐 밖혀 말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나부랭이였다.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 쓸모없었다. 나의 온몸과 영혼이 길 위에서, 나의 공간이 아닌 대중의 공간, 생존의 공간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많았던 그때. 어디서 어떻게 제대로 만났는지 기억도, 기록도 없다. 그런데 사유와 방이란 단어는 훨씬 더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오십 대에 넘어가면서 자주 흉통을 일으켰다.  


파스칼이 다시 나를 찌른 계기가 바로 금동미륵 반가사유상이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한참 전. 우연하게 아이들과 함께 들렸던 국립중앙박물관. 어쩌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정신없을 때였다. 일이었고, 공무수행 중이었다. 열일곱 아이들의 동선을 따라 걸으면서 반가사유상의 얼굴보다는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를 챙겨야 했던 때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78호와 83호가 몇 개월을 사이에 두고 하나씩 유리박스 안에 갇혀 특별 전시의 형식으로 운영되던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거다.


그런데 그 78호와 83호가 몇 해 전부터는 나란히 커다란 독립 공간을 차지한 채 상설 전시가 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그 공간을 엊그제야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불안한 기다림의 끝에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로 내달려야 하는 열아홉 아이들을 스무 명 넘게 데리고. 하지만 이번에는 내버려 뒀다. 각자의 방식으로 관람하고 쉬라고. 삼십 대는 고사하고 사십 대에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 공간에 별 탈 없이 다 모인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사유를 가져다준 이들이니까.


나는 일부러 국립중앙박물관 오픈 시간 오전 10시에 맞춰 미리 갔다. 아이들과 약속된 시간보다 1시간 일찍.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을 다시 돌려보내는 그 시간까지 내내 2층 사유의 방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멀찍이 뒤에 서서 78호와 83호.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면서 자기 감각에 집중하는 이들을 함께 보는 내내 눈물이 흐를 것처럼 황홀했다. 이 글을 (얼른) 쓰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어리고 관심 없는 이들이 왁자지껄 머물다 지나가는 소리도 별들이 부딪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코앞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흔들렸다. 삼십 대 때보다는 내가 조금은 더 익어가는 탓도 있겠지만, 우연히 어둑한 내 카메라 화면 구석에 잡힌 피사체 때문에 더 했다. 어린 여학생 둘이 반가사유상을 향해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모습이 내 카메라에 잡혔다. 조명 자체가 어둑해서 78호와 83호에 맞춰진 은은하게 밝은 조명이 더 선명했다. 그래서 내 망막 바깥에서 두 학생이 움직이는 모습을 나중에야 알아볼 수 있었다.



세 번을 그렇게 아주 정성껏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리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다리를 겹치는 데 서로 더 신경을 쓰는 뒷모습이 참 성스러웠다. 어린 몸의 영혼이 나를 휘감는 것 같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벽에서 바닥으로 내리비치는 조명이 돌아서는 두 여학생의 오른쪽 볼을 타고 흘렀다. 아, 일 년 내내 내 수업을 열심히 들었던 우리 학교 학생회장 벼리였다. 옆은 지난주 내내 면접 준비 팀에서 나의 첨삭을 받으면서 눈물도 코피도 쏟았던 여리였다.


그제야 나를 알아본 벼리와 여린 소곤거리며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 다섯 시, 00 대학 꼭 합격해야 해요~ 기도해 주세요~ 하고. 주먹을 살짝 쥐고 나를 향해 주먹 악수를 청하면서. 그리고 그날 오후 늦게. 벼리는 4년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도시의 중심은 작다. 좁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변 지역으로 넓혀져 간다. 오래된 도시일수록 중심은 더 좁게 느껴지는 이유다. 도시의 중심은 좁다. 뇌도 마찬가지다. 많은 뇌과학자들이 증명했듯이 우리 뇌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심층의 뇌부터 자란다. 그런 뒤에 중간 뇌, 가장 바깥에 있는 새로운 뇌 순으로 커지면서 사람이 사람다워진다.


가장 심층의 오래된 뇌는 행동을 결정하는 담당이다. 그리고 중간에 위치한 중간 뇌는 정서와 관련한 인간의 기능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겉에 있는, 가장 최근에 형성된 새로운 뇌는 합리적인 사유를 담당한다. 그런데 이 구조가 던지는 메시지가 어둑한 사유의 방에서 엎드려 몰입하는 어린 두 여학생에서 읽혔다.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 가타부타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유한다 해서 반드시 삶 자체가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험적 경험이라고.


깊은 사유는 삶이 의미 있게 변할 수 있는 시작인 것이다. 겉에서 시작된 깊은 사유로 과거의 나, 지금의 나를 지배하고 있는 화석화된 정서적 장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그 좁고 어둑하게 외로운 통로에서 다시 가다 서다 하는 과정이 분명 무수하게 반복될 수도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을 길들인 습관이라는 이름의 장벽이 뚫리면 그때야 비로소 자기 변화를 결정하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힘들지만 즐겁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는 행동들을. 남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사유의 정도는 인간의 상스럽고, 성스러운 양면성 그 중간 어디쯤에서 어느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져서 더 깊게 맛을 보면서 더 오래 사람답게(짐승처럼) 살아갈 수 있는지를 결정짓는다. 그 양면성 사이에는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실선과 점선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더욱 나만의 사유의 방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그런 방이 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그 방에서 머무는 행운의 시간이 더 많아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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