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食] 5
하얀 눈가루를 뿌린 듯 말캉거리는 곶감. 하나씩 하나씩 빼어 먹는 맛이 참 일품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곶감 자체보다 하나씩 하나씩이 더 맛난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집니다. 그 마음속에는 너무 맛있다. 사랑스럽다, 그래서 아깝다, 아끼자, 그런데 계속 먹고 싶다. 이 마음이 주르륵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곶감도 그 마음도 함께 잘 꿰어 놓은 건 제 역할을 하는 곶감꼬지 덕분이지 싶습니다. 지금은 그 꼬지가 (쇠 재질로 만들어진) 양고기 꼬지, (하나같이 쪽쪽 뻗은) 어묵꼬지 정도에서나 남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요즘의 곶감은 다 잘 차려 입은 때때옷처럼 가지런히 박스 포장이 되어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곶감꼬지 같은 분이 계십니다. 존대하는 친구입니다. 친구 같은 스승입니다. 조금 가까워지고, 서로를 알아가게 되면 '편하게 말을'해야 하는 사이가 진짜 친한 사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은 우리 사이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동갑이지만 삶과 행동의 깊이가 같아 말을 놓기가 싫은 그런 분입니다. 말캉거리면서 한없이 달달한 곶감을 무한하게 지니고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식사를 하다 보면 내가 괜히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은 착각을 언제나 들게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올 한 해에도 친구와 좋은 만남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저에게 엄청난 삶의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만난다니 지금부터 설렙니다
얼마 전 약속 장소로 달려가는 도중에 친구가 보내온 메시지입니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저 사람은 정말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사람 중 한 사람이 봄부터 기다렸는데 겨울이 시작되고서야 받아 본 메시지입니다. 답장을 바로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끼고 아껴 읽었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노모를 위해 2년째 무급 간병 휴직 중입니다. 그런데 친구를 만나면 또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살고 있는 동네는 물론이고, 낯선 동네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반드시 숨어 있는 맛집을 찾아내 꼭 같이 가자 하는 겁니다.
간판 없는 노포는 물론이고 일부러 숨어 있는 듯한, 동네 맛집을 걸어서, 걸어서 다닙니다. 남자 둘이서. 그럴때면 보통은 묵언수행을 하지 않으면, 그리 쓸데 많지 않은 자기 입장의 농을 주고받기 일쑤입니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좋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만난 이의 입장에서 항상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안부부터 최근에 가지고 있는 생각, 관심사, 의미 있게 진행되고 있는 작업 - 읽기, 쓰기, 새로운 만남, 새로운 도전 등 - 을 '물어봐' 줍니다. 자기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묻습니다. 그러고는 눈빛으로 한참 들어줍니다.
이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 '아 내가 요즘 이런데 의미를 두고 살고 있었구나'를 진하게 한번 더 되새기게 됩니다. 그게 참 좋습니다. 얼마 전 그렇게 친구덕에 한적한 주택가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자그마한 식당에서 몸국을 뜨끈하게 한 그릇 먹었습니다. 아, 이 친구와 만나면 좋은 게 또 하나 있군요. 일 년에 (많아야) 서너 번 함께 하는 맛집은 대부분이 제주 몸국 식당처럼, 한 두 개의 메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한 두 개의 메뉴에 집중하게 됩니다. 생각이 허비되지 않고 작은 것에 몰입하고 흡수하는 훌륭한 경험을 할 수 있어 또 좋습니다. 생각이, 판단이 명료해지는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그날 몸국 식당을 가기 전에 산중턱에 있는 친구의 집에 차를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좁은 길을 따라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야 하는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원주택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주 유명했던) 건축가와 친구가 직접 설계에 의견을 반영하여 만든 집입니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그 집의 이름입니다. 추사가 제주 귀양을 겪고 난 다음 한강변에 살 때 쓴 글씨입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 봐 주는, 다 잡아 주는 서체가 사라지지 않게, 남은 것이라도 잘 (곶감처럼 가지런히) 엮어서 책으로 남겨야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듯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하나하나의 명작들을 거친 돌집에서라도 옆에 두고 오래오래 진하고 달달한 그 향을 맛고 싶어 하는가 봅니다.
잔서완석루 뒷마당 널찍한 텃밭에 가을무와 배추가 한가득입니다. 새벽 공기가 막 사나워 지려하는 무렵. 병약한 노모가 일주일 전 다시 응급실을 다녀오신 뒤, 올해 김장은 진짜 포기하기로 결정한 세 가족의 결과물이랍니다. 구석에서 얼른 커다란 봉투를 하나 챙겨 나옵니다. 그러더니 나한테 건네 놓고 군데 군데 그 밭의 흙이 말라 붙은 칼을 하나 손에 쥡니다. 폴짝 폴짝 신나하는 어린아이마냥 이랑 사이를 걸으면서 기분 좋게 그럽니다. 어떤 걸 드려야 할까요, 한번 골라 보세요. 금방이라도 목청 좋게 노래를 할 듯한 음색입니다. 그렇게 퉁퉁한 배추 두 포기를 툭툭 힘 있게 칼질을 해 담아 냅니다.
그 날 친구에게 선물 받은 배추 두 포기는 아내의 손을 거쳐 속 노란 배추된장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된장국을 2주에 걸쳐 먹었습니다. 그 사이 아내가 한 포기씩 두 번을 나눠 끓여냈습니다. 아내는 그 친구를 경외롭게 생각합니다. 어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지, 입니다. 그래서 배추 한 잎도 덜 버리면서 더 정성껏 끓여낸 게 분명합니다. 멸치와 다시마, 가을무로 우려낸 기본적인 육수와 엄마한테서 얻어 온 집된장.열여덟 따님도 좋아하는 표고버섯 큼지막하게 듬뿍. 그리고 칼칼하게 청양고추 약간. 그게 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2주 동안 열다섯 끼 넘게 속 노란 배추 된 장국으로 만 먹게 만들어 냈습니다.
한 날 (새벽과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이른)아침에는 아내가 먼저 내 옆에 속 노란 배추된장국에 밥을 말아 '아침을' 같이 먹었습니다. 10대 때부터 (거의)먹지 않았다던 아침을. 그러면서 먹어도 먹어도 질리기는커녕 계속 생각나는 맛의 비결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일단 재료이지 싶어집니다. 눈으로만 보고 있어도 신선한 재료. 나 살겠다고 약을 흥건히 쳐서 키워 나도 남도 죽이는 그런 재료가 아닌, 진짜 유기농 재료. 그냥 그 재료만 천천히 씹어도 단맛과 쓴맛, 알싸한 맛과 심심한 맛이 어우러진 깊은 맛이 나는 그 재료가 우선이지 싶습니다.
그다음은 사람 마음이겠지요. 그 재료를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시선으로 손끝으로 전달되어 만들어지는 집밥. 그런 집밥은 슴슴합니다. 간이 세지 않습니다. 질리지 않은 다는 것은 사람처럼 음식도 공격적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나 이런 맛이야하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어때, 어때하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다그치는 마음이 없습니다.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먹으면서 서서히 어, 이 맛인가, 아, 이 맛인가 보다, 하게 만드는 진한 맛입니다. 낭중지추 같은, 그런 사람 맛입니다.
참 좋은 친구덕에 참 좋은 재료로 끓인 속 노란 배추된장국. 12월에 매달려 끝까지 버티려는 11월을 기분 좋게 보내줄 수 있었던 2주간의 행복이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만나도 만나도 질리지 않는 그 맛 덕분에, 그 사람 덕분에. 아내 덕분에. 또 먹고 싶어집니다. 또 보고 싶어집니다. 아침에도, 점심때에도 소복하게 담겨 있는 속 노란 배추된장국이 나를 올려다보며 매번 속삭여 줍니다.
2024년 내년에도 아~ 쉬엄쉬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