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Dec 12. 2023

단종되셨습니다

[나도 따뜻한 T가 될 수 있을까]

열흘 전. 완전히 멈추었다. 딱 열 살 된 아이다. 따님이 여덟 살 때, 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따라온 우리 집 최초의 드럼세탁기. 한 달 여전부터 가끔 돌다가 띨링~띨링 했다. 몇 번을 배수 안됨, 배수 안됨 했다. 껐다 켜고 빨래량을 조정하면 또 돌았다. 그러기를 두 어 번. 그러다 2주 전부터 띨링~띨링~띨링~띨링. 급수 안됨, 급수 안됨.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한 달여 동안 드럼밖으로 물이 흥건하게 흐르면서 마무리되었다. 


나는 돌리던 빨래를 커다란 종량제 봉투에 두 개에 나눴다. 그 사이 자그마한 몇 가지 빨래를 골라 내 손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참, 오랜만에 재연된 장면이었다. 손빨래. 반쯤 젖은 빨래를 보며 선택지는 세 곳. 걸어서 갈 수 있는 코인빨래방, 여름에 이사 온 옆옆동네 친구네. 그리고 옆 단지 엄마네. 아내의 최종 선택지는 엄마네였다. 그렇게 우리는 일요일 오후에 갑자기 엄마집으로 들이닥쳤다.


빨래방은 (다중 이용 시설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의 선택지에서 1순위로 제거되어) 그냥 싫고, 친구네는 공부하는 아이들 때문에 미안해서, 엄마 내였다. 덕분에 일요일 오후 내내 엄마네 세탁기는 열 일을 했다. 그러는 사이 비번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항상 적적해하시는 엄마는 (표현하지 않으시지만) 그득한 오후가 신나 보였다. 자꾸, 자꾸 먹을 걸 내오시는 걸 보면.  


아점을 먹은 지 두어 시간 지났다. 그래도 동태탕 (맛만 본다며 밥 말아) 먹고, (그럼, 조금만 먹어보겠다며 바게트 반봉지를 엄마표 수제) 고구마쨈에 다 발라 먹고, (생전 처음 보는 엄마표 수제) 고구마장아찌를 다 덜어 먹었다. 그러고는 따듯한 엉덩이 덕에 (밤에 잠을 설쳐 더 노곤해하는 아내를 보고) 아버지가 쿠션을 슬쩍 가져다주셨다. 한숨 자, 빨래 다 될 때까지 하시면서. 그리고는 엄마대신 설거지를 시작하셨다. 


그리 넓지 않은 집에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언덕 위 저 멀리서 바람 속에 섞여 달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그 메아리가 달려오다 중간에 뽀드득, 뽀드득 깔끔쟁이 소리를 냈다. 아버지한테 들른 거다. 그러다 다시. 황창연 신부님을 요즘 열심히 만나시면서 훨씬 덜 흔들리시는 할머니의 팔자주름을 보조개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뽀드득과 보조개 사이에 우리 셋이 텅 비었던 일요일 오후를 그득하게 채워드리고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열여덟 따님은 언제나 올라오면 그간의 할머니, 할아버지 휴대폰 상태를 점검해 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사라졌다, 안 들린다, 보고 싶다, 계속 보고 싶다, 항상 떠 있게 해 달라, 찾아 달라. 그렇게 자기(의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멋쩍어하는) 실력을 마음껏 뽐내는 따님도, 아까 그 쿠션에 쓰러져 버린 아내도 뽀드득 거리는 메아리 가 여유 있는 일요일 오후의 미소가 되어 폭 잠이 들었다. 한가한 일요일 오후. 나른한 공간에 같이 모여 한가하니 더없이 몸과 마음이 단단해지는 느낌은, 언제여도 재생되는 기분이라 참 좋다.


설거지가 끝난 아버지는 젖은 옷들을 (당신이 직접 세탁기를 설치했기 때문에 나는 잘할 줄 모를 거라는 억지 이유를 내세우시면서) 하나하나 커다란 봉투에 나눠 담기 시작하셨다. 그러는 사이 마치 태평양 건너 한참을 날아가버려 또 한참을 보지 못할 것처럼 엄마는 연신 그릇, 그릇에 계속 무엇인가를 담아내고 있었다. 하나도 달지 않아 밥처럼 퍼 먹을 것 같은 고구마쨈, 7초를 살짝 쪄서 끓인 조선간장에 일주일 담가 놓은 고구마장아찌, 아주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고모가 보내 준 못난이 사과, 언제나 우리 식구들의 진리인 엄마표 깻잎  그리고 따님이 도시락 반찬으로도 싸가지 못하게 쟁여 놓고 먹는 할머니표 파김치. 


아내가 괜찮다고, 괜찮다고 해도 절대 괜찮을 수 없는 엄마였다. 일요일 오후. 열 살을 가득 채우고 제 역할 다 해준 세탁기가 우리를 떠나는 날 가져다준 이 축복스러운 장면을 나도, 아내도 무엇보다 열여덟 따님도 오래오래 간직해야 할 명장면 중 하나일 거다. 다다음날 오신 젊은 AS기사님. 우두커니 멈춰 서서 아무 말없는 세탁기 앞 쪼그려 앉아 단말기로 검색을 하시는 도중 그랬다. 부품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있어도 37만 8천 원 정도 하거든요. 그러면서 나를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쉽지 않아요, 쉽지 않아요. 


아, 하, 고객님. 이 제품 부품은 단종되셨습니다. 


그렇게 (새 집으로, 큰 집으로,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으로 이사온다고 신나 하던 여덟 살 따님을 십 년 동안 깨끗하게 키워 낸) 세탁기를 보내면서 출장비 2만 원을 입금해 드렸다. 그리고 어제. 4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조카가 도착한 늦은 저녁에 다시 돌아온(?) 추억의 통돌이 세탁기는 예전처럼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조카 트렁크에 가득한 옷가지를 조용조용하게 돌리고, 비비고 있었다. 


내 어릴 적 장면 중에는 엄마의 엉덩이 춤도 꽤나 여러 장 있는가 보다. 따듯한 부뚜막에서 내려다 보이던 엄마의 엉덩이. 위아래로 흔들흔들거리던 엉덩이. 부엌 한 구석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빨래판 위로 떨어지는 물소리.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익숙했던 반복되는 비트. 늘어지게 처량했던 그 비트는 비벼빤 빨래를 옆집 아줌마네로 커다란 고무대야에 담아 들고 갔다 오시면서도 연신 이어졌다. 그 엉덩이 춤이, 흥얼거림이, 집안에 있는 수도꼭지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는 그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던 장면이라는 것을 안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공동 우물에서, 집안으로 들어온 수도꼭지덕에 옆 집 아이스크림 통 같던 탈수기는 전혀 부럽지 않으셨을 거다. 나와 두 살 차이밖에 안나는 6남매 막내를 나와 같이 젖을 먹이는 동안에도. 이야기를 하다 열여덟 따님도 함께 발견한 세탁기의 진리. 바깥에서 묻어 들어온 먹먹하게 답답한 먼지와 기운을 탈탈탈탈 다 씻어내고, 털어내는 기계. 그렇게 공기 같았던 세탁기는 엄청나게 위대한 거였던 거다. 

작가의 이전글 비와 바람에 숨어 있는 빅데이터의 메시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