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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an 16. 2024

311p에서 날리다

[오늘도 나이쓰] 13

흐아. 오늘 글은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방금, 양치를 하면서 혀를 봤다. 선홍빛으로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다. 아주 나이쓰 하게 건강해 보인다. 이때를 기억해야 한다. 이 힘으로 안 그럴 때를 버티는 거니까. 주말 덕분에 월요일이 더 피곤한 거니까. 잉, 뭐래?


여전히 정신이 혼미해서 그렇다. 지지난주. 이미 지난해다. 머틀거리면서 시작되었던 동시다발, 혓바늘이 생기기 시작한, 12월 29일. 그날 저녁. 지금껏 읽은 책중에 손에 꼽히는 두꺼운 책중 한 권읽기 시작했다. 가만 보자. 어, 708쪽이다. 수세기동안 각자의 시대 환경에서 살아 철학자들의 조언이 담긴 책이란다. 잠깐 왔다가 금방 다시 날아간 아드님이 책을 살 때 기다리다 눈에 들어온, 중고책이었다.


온몸이 염증으로 녹아내리듯 노곤해지던 29일 저녁, 두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모든 사물을, 세상을 합리적으로 '의심'하라는 데카르트의 조언부터. 그런데, 책은 그렇다. 두께에 관계없다. 한두 문장, 한두 마디가 평생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 가장 훌륭하게 책을 읽은 걸 거다.


책을 읽고 가슴에 남는 한 문장, 한 단어를 '기억'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지만, 또 비슷할 듯하다. 읽다가 와닿는 문장, 울리는 단어는 몇 번을 반복해서 읽는다. 행간의 의미를 한번 더 읽어내기 위해. 자동반사다. 이런 글이 써져야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기록한다. 그래서 읽은 속도가 꽤나 느리다. 그렇게 동시에 두세 권을 읽는다.


예전에는 종이 노트에 썼다. 그리고 그걸 다시 파일로 만드는 단계를 거쳤다. 그런데, 이 (여유 넘치는 명칭의)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부터는 다들 그러시듯, '저장글'에 기록을 한다. 지금도 그렇게 기록된 너저분하게 들어차 있다. 그렇게 이번 책도 원래 그러듯이 수많은 조언을 (거의) 매일  시간 남짓 읽고 기록했다.


그런데 토요일 오후 2시쯤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집을 몽땅 버리 듯한 분리배출이 무리였을까, 그러는 사이 내 손가락에 살이 쪘을까, 이 화면의 얄궂은 버튼 배열이 문제였을까, 뻐근한 오른쪽 손목을 피해 갑자기 독수리 타법이 된 왼손 때문일까.....(지금도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면서 굳이 이유, 아니 핑계를 찾아내려고 버둥거리는 중이다. 흐아ㅜ). 잠깐만, 여기까지 쓰고 일단 '저장'하자. 저장. 저장. 지금, 히스테리컬 해진 거지, 그렇지?



그들의 조언이 문제가 아니다. 그 조언에 대한 내 생각, 그게 마음이 더 쓰리다. 왜? 기억이 안 나니까. 그렇게 311페이지를 기록하고 저장하다 날렸다. 타닥, 두 번의 터치만에 일어난 일이다. 몇 번을 확인해도 저장글 목록에서 그들의 조언이 사라졌다. 생각이 날아갔다. 갑자기 쭈뼛해지는 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명하게 신선해졌다.


선견지명이었나. 이 글 바로 앞, 지난주 발행한 글의 제목이 '복구'였구나. 복구의 의미도 딱, 지금의 상황이었구나. 복구,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에너지 되찾기.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311페이지 가득한 문장과 단어들. 그것만큼 많은 '내 생각들'. 그것들은 아마도, 그럴 거야, 분명, 아직은 온전히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는 의미일 거야.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다. 한참, 선명하게 멍했다. 일단, 상처 남은 그 책은 311페이지, 그람시에서 접어 두었다. 그리고는 옆에서 늦지만, 나란히 읽고 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짜리 몽땅한 키, 항상 맨발로 냄새나는 단벌 외투를 입고, 광장을 배회하면서, (지금 나의 심정처럼) 아무나 붙잡고 말로 시비를 거는 그를 상상해 본다.


아무렇게나 생긴 눈썹 아래 툭 튀어나온 눈알, 두툼한 입술. 한마디로 냄새나게 못생긴 소크라테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크산티페가 악처이고, 성격이 못되고, 예민했다고? 이런 남편을 두면 그렇게 되지 않을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수세기 동안 각자 따로 살다 (거의) 만나지도 못한, 수많은 사상가들이 만약에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 다 모인다면 어떨까. 넓디넓은 잔디 광장에 다 모여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마, 일단 나이따지고, 읽은 책 좀 따지고, 그렇게 파벌로 끼리끼리 뭉치겠지.


그리고는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포도주 몇 잔씩하고 나면, 분명 격투기 비슷한 운동을 즐기느라, 다들 정신이 없을걸. 뜬금없게도 이런 쓸데없는, 그런데 너무도 재밌는 상상을 하는 나를, 따님이 측은해하는 것 같다. 슬쩍 지나쳐 가는 나를 보는 눈빛이. 아, 나도 격투기 배우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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