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Jan 12. 2024

복구

[오늘도 나이쓰] 12

그런날이 있습니다. 동시다발. 어제가 그런 날이었나 봅니다. 집 앞 스벅에 앉은 지 두어 시간. 노트북 화면이 갑자기 어둑해졌습니다. 배터리 부족이었네요. 어, 하고 콘센트를 보니 꽂혀 있습니다. 이럴 때는 (본능적으로) 원인 진단의 방향이 두 방향입니다. 안이야 밖이야. 안은 내 것들이고, 밖은 외부의 요인들. 자리를 옮겨서 확인해 보니 역시 나였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몇 군데 검색으로 서비스센터를 찾아갔습니다. 집에 차를 두고 와 다시 이십여분을 걸어가 차를 가지고 한 곳으로 달렸습니다.


그렇게 걷고 달리고를 왔다 갔다 하느라 다시 두어 시간이 흘렀습니다. 몇 년을 콘센트, 얼마 전부터 살짝 피복이 벗겨져 있던 접지 부분이 문제였나 봅니다. 비용은 4만 4천 원. 몇 년 만에 비용이 든 거다 생각하니 속이 조금은 편해지는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스벅, 자리로 돌아와 꽂으니 여전히 노트북 화면이 켜지지 않더군요. 다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때서야 들어옵니다. 앉던 기다란 다인용 테이블 아래 콘센트가 마침, 어제 시각부터 고장이 것이었습니다.


나올 때 보니 직원분이 노란 포스트잇 여섯 장을 (고장) 수리 중!이라고 붙여 놨더군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까 급하게 지상에 세워두었던 '이영모 씨'를 다시 움직이려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삑삑, 삐리릭하는 전자음이 다시 들렸습니다. 며칠 전부터 주행 중에 가끔 나는 꺼림칙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시간을 빼서 점검을 받으려고 예약을 해 둔 차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빈자리에 후진으로 주차를 하려는 순간, 시동이 꺼졌습니다. 처음 있는 일입니다. 지하주차장이지만, 차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잠시 호흡을 고르고 보니 큰일 날 뻔한 일이었더군요. 며칠 전부터 차가 조금 이상하다 생각을 했는데, 긴급출동한 기사분이 그러시더군요. 차가 (스스로) 도난으로 인식되어서 차량이 잠긴 경우라고요. 배터리는 살아있는데 모든 기능이 일시에 셧다운 되어 버렸던 겁니다.


지금 타고 있는 에스유브이. 2015년 산으로 우리 가족에게는 태권브이보다 더 훌륭한 차입니다. 작년 한 해를 정산하면서 감사의 글에 등장했던 '이영모 씨'(20모 ****)입니다. 세 번째 차이지만 내돈내산의 첫차였지요. 주행거리는 20만이 조금 안됩니다. 꽤나 많이 달렸습니다. 우리 가족의 역마살을 잘 달래주느라. 기사분이 설명하시는 동안 (속으로) 단박에 원인을 알겠더군요.


따님이 이영모 씨라고 부르는 우리 차는 다른 차에는 없던(그러나 지금은 거의 있는 ㅎ) 기능을 추가로 추가했습니다. 바로 원격 시동. 휴대폰에서 어플로 차의 모든 기능을 제어할 수 있는 아이오티 기능입니다. 밴쿠버에서도, 쿠알라룸프르에서도, 홍콩에서도 껐다 켰다가 가능합니다. 위치 파악이 가능합니다. 도난방지를 위한 엔진 강제 멈춤이 가능합니다.


차량 내에 단말기를 하나 설치해서 통신 회사와 월정액을 지불하면서 유지하는 차량용 통신시스템이었습니다. 몇 가지 장점은 전. 세. 계. 어디서건 원격으로 (추운 날) 시동을 미리 켤 수 있고, (더운 날) 에어컨을 미리 켜둘 수 있습니다. (아빠 문 좀 열어줘 하면) 집에 누워서 열고 잠글 수 있고, 폰이나 차키를 들지 않고도 앞유리에 붙여져 있는 번호판으로 문을 열고 잠글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폰을 들고 차를 향해 다가가면 알아서 열리고, 멀어지면 스스로 문을 잠급니다.


차도, 저도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는 누군가가 노룩패스하듯이 그렇게 '있는 척'할 수 있는 옵션들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항상 인생의 옵션은 추가 비용을 의미합니다. 7년간 20만을 달리면서 이 기능 유지를 위해 들어간 비용. 거칠게 계산만 해봐도 110만 원 정도이더군요. 지금 차량에 기본(이라고 표기하고 옵션값은 여전히 차값에 포함된) 기능으로 나오는 이 기능들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비용입니다.


물론 이 비용에는 어느 추운 겨울날, 인천공항 주차장에서 쿠알라룸푸르, 홍콩에 있는 저의 휴대폰과 열렬한 통신을 주고받느라 방전이 되어 도착한 후 차량을 움직이지 못했던 비용은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견인을 해서 완전 방전된 배터리를 교체한 비용은 빠져 있습니다. 네 집이 같이 갔던 여행에서 동시에 구매한 나의 유심 데이터만 일찍 소모되어 폰을 사용하지 못했던 비용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긴급출동 기사님 덕분에 다시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예약했던, 7년 전 이영모 씨한테 이 기능을 장착해 주었던 대리점으로 갔습니다. 다시 3만 원의 장착, 아니 탈착 비용을 지불하고 제거했습니다. 다행히 계속 이 분야의 일을 하고 계신 젊은 사장님 덕분에, 사장님 표현대로 이영모 씨는 원래 태어난 모습 그대로 '복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5년간 (거의 매일) 쓴 노트북 콘센트 전원선, 8년 가까이 (거의) 매일 달린 이영모 씨 그리고 스벅의 그 넓은 테이블의 여섯 개 콘센트가 동시에 탈이 난 날, 동. 시. 다. 발. 그런 날이 어제였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한꺼번에 생긴다고 하지요. 어제 같은 일은, 사는 거에 비하면 일도 아닌 걸 텐데요. 하루 그렇게 허비(!)하듯 시간을 보내고 이 새벽에 일어나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 그 시간들은 허비가 아니라 원래를 찾아가는 복구의 시간들이었구나 하고. 그러면서 원래 산다는 게 기본값에 수많은 옵션들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졌습니다. 물론 그 기본값도 다 다르지요. 강렬하게 원하는 옵션도 다 다를 테고요. 그런데 누구나 공통된 기본값과 옵션이 있지 싶습니다. 바로 '마침', '하필'로 표현될 수 있는 <선택의 이유>입니다. 그때 그 상황에 비용을 들이면서 마침 필요했던, 하필 그(거)였던 선택의 이유말입니다.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영모 씨를 열고 닫았던 스마트키도 8년 가까이 그 자그마한, 얇디얇은 배터리 하나 덕분이었다는 것을. 한 번도 새것으로 교체해 주지 않았었다는 것을. 오히려 더 놀라웠습니다. 8년 가까이나 살아있었다는 게. 그러면서 순간 오싹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이들이 영원할 거라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말 안 해도 알 꺼라 혼자 그렇게 편하게 믿고 싶었나 봅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하면서 퉁치려고 하는가 봅니다.


지금도 옆에 있는, 지금껏 자기 일처럼 나를 도와주는, 나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이들은 내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선택한 이들이었던 겁니다. 비용이 아니라 나를 소모해서라도 함께 하고 싶고, 지켜주고 싶고, 보호받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그 선택의 이유가 그저 가물거린다고 핑계를 대놓고 대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어제를 잘 저장해 두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선택의 이유를 다시, '복구'해봐야 할 거라는 말을 노트북이, 이영모 씨가 하루 종일 대신해 준 날을. 고맙게 나이쓰 한 또 하루의 날이 어제였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이전 11화 횟집의 낯선 지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