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Jan 09. 2024

횟집의 낯선 지혜

[오늘도 나이쓰] 11

새해 둘째 날. 입속 전체를 점령한 혓바늘은 여전히 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몇 주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사무실 회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종종 이렇지요. 공간을 채우는 공기가 마치 어떤 날은 비어 있다가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모조리 몰려 있는 것 같은 날이. 혓바늘에 발음까지 부정확하니 주변 동료들이 묻습니다. 가능한가 하고. 그런데 회식이 예정되어 있던 장소의 특성 때문에 가능해야 했습니다. 완전 예약제이기 때문에 예약한 인원만큼 비용은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저는 혓바늘로 음식을 먹기가 쉽지 않았지만, 흔쾌히 가야 했습니다.


퇴근을 한 후 한 시간 정도 자동차로 달려가야 하는, 꽤나 먼 곳이었습니다. 00 횟집. 장소를 섭외한 분의 동네인데, 원래부터 입소문이 많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본인도 한번 오려고 했는데, 한두 달 전에 예약이 다 마감되는 곳이라 지금껏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내비게이션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찾기 쉽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습니다. 3-4층짜리 신축 빌라들이 주르륵 있는 택지 개발지구. 한 골목 끝 건물. 갈색 벽돌이 꽤나 잘 어울리는 한 빌라의 1층이 00 횟집이었습니다.  


총 8개의 미닫이 룸이 있었습니다. 앉아서 음식이 나오는 동안 예약을 해주신 동료가 잠깐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횟집만의 특이한 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메뉴가 하나입니다. 일인당 4만 원 정식 코스. 두 번째, 어느 날이건 예약된 테이블에는 한 팀만 받는다는 겁니다. 시간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2인룸이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4인룸. 4인룸은 옆 룸과 칸막이로만 구분되어 있어 최대 6인까지 가능했습니다. 여느 일식집처럼 등받이 의자에 테이블 아래가 움푹 져 있어 앉기도 편안했습니다. 예약이 되어서 그런지 음식이 주방에서 빼꼼히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천리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는 메뉴마다 혓바늘에 자극이 가는 음식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꺼번에, 많이 먹지만 않으면 가능한 메뉴들이었습니다. 간장에 고추냉이를 넣지만 않으면 말이지요. 그렇게 나온 메뉴는 보들보들한 계란찜, 소고기 야채죽, 바닷장어 튀김(2마리), 홍가리비찜, 낙지탕탕이, 굴보쌈, 달군 돌 위에 즉석에서 익혀 먹는 부챗살, 등심 돈가스, 너무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살아 있는 은대구 구이, 은대구 지리탕, 은대구 매운탕에 알밥. 메인 메뉴로는 숙성 참치(볼살, 뱃살), 낙지 숙회, 넓게 바닥을 깔고 있는 회는 모두 광어


특히 보들보들한 계란찜은 동료들이 저에게 다 양보를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소고기 야채죽은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약간은 달짝지근한 특제 간장을 살짝 올려 먹으니 간간하게 혀를 기분 좋게 마비시키는 듯했습니다. 의례 익숙한 자잘한 소고기가 아니라 큼지막한 고기가 뻑뻑하게 가득 있었습니다. 종업원께 야채죽을 추가로 주문까지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메뉴는 없다면서 그냥 덤으로 더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게 한잔씩 하는 동료들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주 천천히 혓바늘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연말연시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혓바늘은 그렇게 무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왜 맛집인가는 몇 가지 점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종업원이 두 분, 메인 셰프 사장님이 한 분. 이렇게 세분이 함께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표정들이 그렇게 온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빙을 해주시는 중년 종업원 두 분의 시종일관 과하지 않게 잔잔한 미소는 일대일로 따라 배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기질이나 영업상 필요한 표정일 수도 있지 싶었는데, 서너 시간 있는 동안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내면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그런데 거기에는 그 집만의 분명한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하루에 한 테이블. 거기에 해답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맛집이어도, 손님은 얼른 먹고 일어나야 합니다. 종업원은 다음 팀을 위해 능숙하게 상을 치우고, 다시 세팅하고, 다시 미소로 친절하게 시작. 쉽지 않지요. 그런데 그 횟집은 하루에 최대 단 8팀. 거기에서 사장님과 종업원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서로에 대한 존중이 가능해지지 싶었습니다. 00 씨 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그렇게 서로 주고받는 말의 속도에서 여유가 가득했습니다. 말의 온도가 따듯했습니다. 사장님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요. 네. 네. 그럼요. 가능합니다. 아, 그건 저희로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한번 고민해 봐야 할 아주 좋은 아이디어 같습니다. 00 씨, 이거 8번 룸입니다요.


두 번째. 단일 메뉴 방침에서 나오는 느긋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룸과 룸 사이에 졸졸졸 소리가 나면서 흐르는 자그마한 정원의 물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아늑한 공간에서 다음 순서가 무엇인지가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 항상 공유가 되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하고 있고, 해야 하는가에 대한 팀워크가 매 순간 발휘될 수 있는 일처리 방식. 원천적으로 사일로 효과가 차단되는 상황이 서로를 다급하지 않게, 실수하지 않게, 옹졸해지지 않게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룸 앞을 밝힌 은은한 할로겐 등도 평화로워 보일 정도로.


세 번째. 혹시 먼저 이야기한 메뉴 기억나시지요? 분명, 00 횟집이란 상호처럼 횟집입니다. 그런데 일인당 4만 원으로 나오는 메뉴에는 꽤나 많은 고기가 있었습니다. 잘게 썰지 않고 꽃모양으로 넓게 플레이팅 된 육회, 달구어진 돌 위에 직접 올려 구워 먹는 소고기 부챗살, 너무 부드러워 소고기인 줄 알았던 돼지 등심 돈카츠. 횟집이지만 고기맛집이었습니다. 고기가 모두 한우인 데다가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최대한 고기의 육질을 즐길 수 있게 나오는 요리법이 고기 본연의 맛을 살려주고 있었습니다. 날것을 선호하지 않은 이들과 편안하게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준 배려 가득한 메뉴 구성이었지 싶습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오는 출입문 한켠. 들어갈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자그마한 수조하나가 보였습니다. 인기 횟집에 채 1미터도 되지 않은 길이의 수조가 단 한 개 있더군요. 그 안을 들여다보니  그물망에는 낙지가 수북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조 바닥에는 시커먼 생선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수종은 단 하나. 모두 광어였습니다. 아, 그래서 메인 메뉴로 나온 커다란 자갈판 위에 올려진 참치 조금, 낙지 숙회 조금 외에 메인 회가 광어였던 겁니다. 횟집에 회는 광어 하나뿐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광어. 지금껏 횟집에서 봤던 손바닥 보다 조금 큰 광어가 아니었습니다. 한 마리의 키가 보통 지금 글자를 치고 있는 키보드 만했습니다. 허언증이나 과장하기 위한 게 절대 아닙니다.


수십 년간 회에 일가견이 있는 고향 친구가 그럽니다. 대방어처럼 대광어도 정말 육질이 좋아 비싸게 유통된다고. 두툼하게 썰어낸 광어살이 정말 찰지게 쫀득거리는 이유가 그런 이유였습니다. 횟집에서 나와 집으로 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장님이 참 지혜로우신 분이구나 하고요. 도마일을 하다 말고 바로 서 멈춘 뒤 우리 일행을 위해 목례를 하는 그 표정은 기계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놀이터에 함께 놀러 왔다 돌아가는 이들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어주는 사람의 표정이었습니다. 은은한 눈빛, 살며시 다문 입술, 맞잡은 두 손은 정직하게 한 길만 가자, 한 가지라도 정확하게 잘 하자,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자, 자랑하지 말자, 벌리지 말자, 욕심내지 말자라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새벽에 일어날때 혀에 미끄덩한 액체 약으로 코팅이 된 듯 했습니다. 혀로 하나 하나 만져지는 혓바늘들이 한 두개를 빼고는 가득하게 새살이 채워진 듯 했습니다. 어제 횟집에서 맛봤던 달짝지근한 간장이 여전히 남아 있는것처럼. 그렇게 지금은 촉촉하게 찰랑거리는 나의 혀로 다시 돌아와 있습니다. 그 횟집 예약을 시도해봐야 겠습니다. 다시.

이전 10화 기억과 기대 사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