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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an 05. 2024

기억과 기대 사이

[오늘도 나이쓰]10

지난 12월.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겨 지 않았을 무렵. 벼리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3년 만이었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던, 걸리면 죽는다고 모두가 확진자 동선을 따라 추적하는 게 일상 중 하나였을 때 우리 반 반장이었다. 대면, 비대면으로 수업이 왔다 갔다 할 때라 학교다운 것을 아무것도 못할 때였다. 그저 숨만 쉬고 있어도, 몸에 아무런 이상만 없어도, 옆 친구가 그 자리를 매일 차지하고 앉아 있어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어제. 벼리가 연락한 덕분에 스물 둘 우리 반 아이들을 만났다. 3년 만이었다. 여전히 영상을 찍는 하나, 연기 입시를 다시 준비하고 있는 둘, 여전히 사귀고 있는 셋과 넷, 키가 더 큰 미소천사 다섯, 몰라보게 살을 빼서 정말 몰라 본 여섯, 여전히 콧소리가 귀여운 일곱, 여전히 털털한 여장부 여덟, 부대에서 직접 전화를 한 몸짱 아홉 그리고 전화 너머에서도 울고 있었을 또 다른 반장 열까지.


골목을 찾아 헤매는 나를 위해 4층에서 미리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반장 벼리 그리고 다섯. 뜨거운 눈물을 자주 흘렸던, 속 깊었던 벼리는 여전했다. 나를 보자마자 함박 미소로 두 손을 꼭 잡아 달라는 듯 내밀고는 소리 없이 눈물을 한참 흘렸다. 여전히 갈색 눈동자가 진심으로 다가오는 다섯의 깊은 보조개는 처음이었다. 깊은 보조개 때문에 더 하얗게 도드라진 볼이 붉어지는 것도.


마스크를 벗고 있는 아이들. 너는? 너, 너지? 이러는 동안 1년을 같지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 그렇지만 한 마디씩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눈빛들은 모두가 다 그대로였다. 모두가 다. 오히려 마스크를 썼었기 때문에 서로의 눈빛을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 게 참 익숙했던 덕분이었을 거다. 정말 오랜만에 참 좋은 아이들 눈빛을 편안하게, 한가득 내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해가 바뀌는 앞뒤로 나는 그랬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 이름들을 다시 찾아봤다. 그리고 그 눈빛들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렸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의 이름을 보자마자 수십 장의 그때가 휘리릭 지나치기도 했다. 단 하나의 장면도 떠오르지 않는, 안타까운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어제의 아이들도 그랬단다. 이야기 내내 아이들은 3년 전 본 서로의 눈빛으로 우리 반 누구누구의 기억들을 서로 이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누구누구가 오늘 반창회에 나오기로 한 약속을 기억하고, 약속 장소에서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누구누구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커튼을 걷고 들어오는 누구누구가 3년 전 그 눈빛을 가진 누구누구라고 자각하는 시간들이 소주잔과 소주잔 사이에 가득하게 이어져 끊임없이 넘쳐흘렀다. 그렇게 기억과 기대 사이를 오가는 스물 둘 아이들의 눈빛 속에는 3년 전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들어차 있었다.


나의 과거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항상 지금에 만나는, 그때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기억으로만 그때의 나를 깨워낸다. 이럴 때마다 지금에 있는 내가 참 투명해진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서 와서 미래로 가는 중이지만, 항상 지금에 존재한다. 지금도 그때는 미래였다. 이렇게 우리 각자가 맞닿아 있는 이 세계의 지금은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연결되는 거대한 통로이다.


나도 타인들에게는 타인이듯, 우리는 그 거대한 통로에서 수많은 타인들과 마주친다. 통로에서 만나는 타인들은 모두 자신의 의식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투명하게 알 수 있다는 오만함과 이 세계에는 나의 의식을 투명하게 알 수 없는 타인들이 넘쳐난다는 겸손함을 유지하려는 사이의 어디쯤에서 다들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의 현재는 항상 이렇게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에 물들어 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기억과 기대에 물들어 있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금에서 사람끼리 서로 마주하는 관계가 사람 사는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스물 둘 아이들은 그렇게 잘 연습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의 마음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으로 새로운 현재, 진정한 오늘을 바라보는 연습을. 그래서 더 자주 사람끼리 서로 더 자주 마주쳐야만 한다는 것을.


방금 보고 온 아이들의 눈빛이 금새 다시 보고 싶어졌다. 늦은 저녁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 주는 찬바람이 나를 혼자 중얼거리게 만들었다.


'따듯한 너희들이 금방 봄을 데려올꺼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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