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다 컴퓨터를 켰다. 아내 덕분에 알게 되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다. '유퀴즈 언더 블럭'. 덕분에 수요일 잠드는 시간이 늦어진다. 컴퓨터를 켜면서 보니 10시 반이 다 되어간다. 10시 반에서 11시 사이에 어김없이 잠이 온다. 이십몇 년간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습관이다. 그런데 오늘은 더 늦게 잠들어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오늘 낮에 기분 좋은 산책을 돌아보고 싶어 져서.
사실 한 달 넘게 열심히 글을 쓰고 있긴 하다. 다른 종류의 글을. 정해진 내용을 쉽게, 잘 전달하기 위해. 매년 이맘때 반복되는 글쓰기이긴 하다. 하지만 내년 전근을 위해서 올해는 유난히 신경이 더 쓰인다. 과목도, 대상도 달라지는 내년에 사용할 나만의 교재를 만들고 있다. 교과목이 바뀌고, 아이들이 바뀌면, 나는 늘 그런다. 그게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학습면에서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가 시키지 않지만, 나 스스로 준비하면서 뿌듯하고, 행복해지는 기분은 덤이다.
정해진 교과서로 가르치는 건 내가 먼저 갑갑하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생긴 병이다. 하지만 나를 지금껏 살아 움직이게 만든 몸에 좋은 고질병이다. 그나마 지금의 나 정도를 있게 만든, 근본적인 원동력이기 때문에. 이십몇 년을 넘게 가르치면서 많은 인생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삶 속에서 내 인생이 여실히 비춰보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위로받는 건 '정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 내는 방법에 대한 귀띔이다. 교과서 속에 갇혀 있는 죽은 지식은 검색을 하면 나온다. 하지만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조언과 가르침이 더 많이 필요한 세상이다. 그 속에서 내가 자그마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할 수 있다는 다짐으로. 다를 그럴듯하게 사는 것 같지만,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힘들어하고, 자책한다.
점심을 먹고 동료가 산책을 하자고 먼저 이야기를 건넸다. 다른 학교에서 이십몇 년을 근무하다 올 한 해를 같은 사무실에서 보내고 있는 동료다. 그 동료는 참 유쾌하고 친절하다. 게다가 독서와 관련해서 아주 유명한 저자이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스타이다.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늘 존재하는 인싸 같은, 그런 사람. 40분 조금 안되게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낙엽을, 가을을, 달리기를, 산책을 그리고 맛있는 화덕 피자를 이야기했다. 그 사이사이에 그 이가 나를 챙겨보면서 느꼈던 이야기를, 자신의 꿈을, 나의 인생을 이야기했다.
모든 것에 '대학입시'가 우선하는 10대들의 삶이 정상인 듯 돌아가지만, 매 순간순간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직업을 가진 50대지만, 어린 그들에게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를 가르칠 방법이 많지는 않지만, 그러면서 스스로도 '정답 없는 인생'을 넉넉하게 살아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힘을 모으면 좀 더 사람답게, 건강하게, 행복하게, 웃으면서 세대를 넘어서 서로의 인생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좋은 기억을,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란 확신을 준 동료에게 눈물 나게 고맙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만 하면 무엇인가 보장될 것처럼 달린다. 하지만 한 발짝 옆으로만 비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봐도 금방 알 수 있다. 특히, 내가 남의 인생을 봐주면 더욱 그렇다. 정답이 없는 인생이라는 말이 보장되는 인생이란 없다는 의미라는 걸. 달리고 있는 그 자신만 모른다. 그래서 꼭 이겨야 하고, 합격해야 하고, 남겨야 하는 거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같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면, 서로를 격려할 수 있다면, 잠깐 기대어 쉴 수 있게 해 줄 수만 있다면 달리는 게 덜 외롭고, 힘들 텐데.
아이들이 자주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무엇을 하면 잘할 수 있을까'이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같다. '지금 하고 싶은 게 제일 잘하는 걸 거'라고. 그리고 10년 뒤에도 그 뒤에도 그때 많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도 그때도 '그때 제일 잘하는 걸' 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그런 아이들, 어른들이 뒤섞어 신나는 난장을 펼칠 수 있는 그런 공간과 시간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겠다고 산책 끄트머리에 다짐을 하게 되었다. '한 번뿐인 인생, 살아 볼만 했다'하면서 눈을 감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번 생이 마지막이니까.